감리교 인물 DB 윤태현(尹兌鉉, 1888. 3. 26~1961. 12. 27)


목사

경북 울진에서 출생. 소년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후 울진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점점 장성하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생에 대한 의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이렇게 살다가 죽고 마는 것인가의 문제로 고심하였는데, 고루하고 생명을 잃은 유교사상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하나고, 새로운 생명적인 진리가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그 길을 택해야겠다는 것이 또 하나였다. 이러한 때 마침 그 지방에 처음으로 매서인이 나타나 복음을 전하자 예수를 믿을 결심을 했다. 그리스도인이 된 증거로 상투를 잘라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물론이고 온 동네가 큰일이 난 듯이 소동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윤태현을 죽이겠다고 찾아다니고 부인은 친정에서 데려가 버렸다. 그는 산에 숨어서 며칠을 지내며 기도를 했고, 기도를 통해 낙심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윤태현의 생활이 변한 것과 부모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고 예수교가 진리인가 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년이 안 되어 그의 부모님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윤태현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윤태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처가에서도 하는 수 없이 부인을 다시 돌려보냈다.

윤태현은 복음의 진리를 점점 깨닫게 되자 복음의 사도가 될 결심을 하였고 서울 피어선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8년 1월 졸업하였다. 그 해 집사목사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서부연회에 허입하였고 1930년에 장로목사가 되었다.

윤태현이 목회한 지역은 남쪽에서 북쪽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해당한다. 1915년 강릉지방 망상교회에서 목회생활을 시작하여 강원도 삼척교회(1917~1919), 강릉교회(1919~1921), 횡성교회(1922~1927), 사강교회(1927~1929), 구장교회(1929~1933), 황해도 회천교회(1933~1934), 구장교회(1934~1935), 북진교회(1935~1939), 사리원교회(1939~1942), 강원도 이천교회(1942~1944), 철원교회(1944~1948) 등지에서 시무하였다. 1948년 서울 청파동교회에 부임하여 교회 진흥과 전도활동에 주력했는데 특히 중고등부 학생들의 모임인 신우회를 지도육성하여 구덕관, 이윤재, 손종률, 강인숙 등의 많은 지도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1951년 경동교회로 전임하였다가 1953년 돈암교회로 옮겨 1959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헌신하였다. 1961년 12월 27일 별세하였다.

윤태현의 목회지역을 쉽게 열거했지만 교역생활을 통해서 피눈물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낙심하지 않고 한 번도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윤태현의 이런 믿음을 보고 그 아들 성범도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이 길만이 가장 복된 길임을 아버지의 생활에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아들 성범은 고백하였다.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윤성범이 그 아버지 윤태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보자면, 첫째로 윤태현은 굳은 신앙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믿음으로 그의 일생은 일관되었으며 이는 믿음의 영향이 그의 변함 없는 굳은 의지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한다. 둘째로 4, 50년 동안의 교회생활 가운데서 남녀문제나 돈문제로 잘못된 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강직한 성격에 의한 것이라 한다. 셋째로 그는 사랑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버린 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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