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윤치호(尹致昊, 1865. 11. 20~1945. 12. 6)


사회운동가. 호는 좌옹(佐翁)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토포사(討捕使)에 등용된 부친을 따라 9세에 상경하였다. 부친의 배려로 1881년 봄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에 유학, 개화사상가이자 기독교인인 나카무라(中村正直, 1832~1891)가 설립, 운영하던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으며 뒤에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후쿠자와의 지도를 받았다. 또한 김옥균ㆍ서광범ㆍ박영효 등과도 접촉하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유학중 영어를 터득한 그는 1883년 5월부터 주한 미국 공사 푸트(L.H. Foote)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어 그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1884년 6월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S. Maclay)가 내한하여 김옥균을 통해 한국 선교활동을 신청하자 고종이 학교와 병원사업을 허락하였는데, 이 과정에 미국 공사가 개입하였으며 윤치호는 그의 통역관으로 참여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로 임명된 부친이 유배당하자, 그는 1885년 1월 푸트의 소개장을 갖고 일본을 경유,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상해로 망명 겸 유학의 길에 올랐다.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 중등과에 입학한 그는 2년 동안 좌절과 갈등의 나날을 보내다 기독교 신앙을 결심, 1887년 4월 3일 신앙고백서 원봉진교서(願奉眞敎書)를 제출하고 중서서원 교수인 본넬(W.B. Bonnel)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유교의 가르침을 따라 완전한 생활을 하면 족하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윤리적 생활을 계획하고 노력해 보았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교훈과 노력으로는 완전한 윤리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으며,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결심하는 고백이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가히 일생에 있어서 제일 큰 날이라 하겠다\"고 기록했다.

1888년 10월 중서서원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미국에 유학,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서 3년,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도합 5년에 걸쳐 신학 및 현대 학문을 공부했다. 1893년 3월 그간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마련한 한국 선교기금 2백 달러를 에모리대학 총장 캔들러(W.A. Candler)에게 위탁, 한국 젊은이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해 11월 상해 중서서원 교수로 부임해 가르치다가 1895년 2월 3일, 조국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곧 남감리교 본부와 연락하여 헨드릭스 감독으로 하여금 리드(Reid) 목사를 대동하고 1895년 10월 13일에 한국을 방문하도록 했다. 이때 남감리회는 한국 선교를 결정하고 리드를 첫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다.

또한 그는 귀국 후 학부협판ㆍ외무협판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다시 학부협판이 되어 대신서리(大臣署理)의 일을 겸하여 보다가, 그 해 4월 전권공사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여 모스크바에 3개월간 머무르다가, 8월 하순에 일행과 헤어져 파리에서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1897년 초에 귀국하였다.

한편 그 해 5월 사재로 한옥건물을 마련하여 남감리교 최초 교회인 고양읍교회 창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고, 6월 21일에는 광희문교회 창립예배 설교를 맡는 등 남감리교회를 설립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1898년 2월 중추원 부의장에 취임하고 겸하여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회장에 올랐고, 서재필이 강제출국 당한 뒤 〈독립신문〉 사장이 되었다. 그 해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를 열어 자주독립을 외치다, 반대세력과 외압에 의해 해산령을 받게 되었다.

1899년 지방으로 밀려난 그는 덕원감리, 삼화감리, 천안군수, 무안감리 등을 지내다가 1904년에 외무협판으로 다시 기용된다. 그러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함으로 외무부가 해산되자, 그도 조약체결 당일 외무협판직을 사퇴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1906년 10월 캔들러와 상의하여 개성에 한미서원(韓美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전념하다가,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연루되어 교직을 떠났다가 다시 1922년 이 학교의 후신인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 1925년까지 봉직하였다.

한편 그는 1904년 상경 이후 그 무렵 출옥한 이상재, 남궁억 등 동지들과 함께 YMCA운동에 동참, 1905년 YMCA 이사로 활동하였고 1908년 이사회 부회장, 1916년에서 1920년까지 총무가 되어 모든 실무를 지휘하였다. 이 시기 종교활동에도 주력하여, 1908년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조선지부장으로 일했고, 1910년에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감리회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가했다가, 미국 선교부의 초청으로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첫 세계선교회의(I.M.C)에 참석해 외지 선교문제와 경제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토로했다. 이처럼 그는 남감리교를 한국에 도입하고 설립하는 데 공헌하였고, 세계 및 한국의 교회연합사업에 앞장섰다. 이러한 에큐메니컬 정신이 1930년에 그로 하여금 남.북감리교회 연합을 추진하게 하였고, 이후 1940년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42년까지 봉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13년 석방된 이후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이때 〈매일신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친일을 공언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최남선과 신익희의 권유를 거부하고 〈매일신보〉에 불참 이유를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노골적인 친일반역행위를 하여 해방과 더불어 친일파로 규탄의 대상이 되었으나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일삼다가 그 해 12월 6일 개성의 자택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별세하였다.

그는 1879년 결혼한 강씨 부인을 1886년에 여의었고, 1894년 결혼한 두 번째 부인인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과의 사이에 영선, 광선, 봉희, 용희를 두었으며, 1907년 세 번째 부인인 백매려(1890~1943)와의 사이에 문희, 은희, 명희, 장선, 기선, 보희, 영희, 정희 등 5남 7녀를 두었다.

-저서:〈윤치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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