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윤창덕(尹昌德, 1909. 9. 8~1985. 9. 7)


감독

평남 평양에서 부친 윤석과 모친 김명심의 장남으로 출생. 1931년 3월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6년 3월 마경일 한세홍 이호운 등과 함께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3년 11월부터 강서지방 함종교회에서 교역을 시작하였고 황해도 해주 남본정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인 1939년 5월 7일 기독교감리회 서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칸사이학원(關西學院) 신학부에서 공부하며 고베(神戶) 시외 다가라스가교회를 담임하였다.

1941년 칸사이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해주 사리원교회(1941~1943), 진남포지방 덕동교회(1943~1946)에서 시무하였다. 윤창덕 목사가 귀국하던 무렵의 북한지방은 일제의 기독교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해방이 된 후에도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교세가 급속도로 쇠퇴해가는 시점에 있었다. 1941년 감리교단 혁신안에 의해 3부 연회가 해산된 후 해방될 때까지 서부연회는 모이지 못하였다. 해방 후 서부연회가 다시 모이게 된 것은 1946년 평양중앙교회당에서였다. 여기에서 해방 후 첫 서부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49년 남산현교회에서 모인 해방 후 제4회 서부연회에서 연회장 송정근이 연임되었으며, 윤창덕 목사는 서기에 피택되었다.

1946년 8월부터는 평양지방 채관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서부연회 직영 신학교였던 성화신학교 강사로도 출강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공산당의 박해로 성화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1ㆍ4후퇴 때 서부연회에서 목회하던 박대선, 조윤승, 김용옥, 한승호, 이진구 등 46명의 목사와 함께 남하하여 육군 군목으로 활동하며 군종제도 정착에 공헌하였다.

1951년 4월부터는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여 감리사를 겸무하여 목회하였다. 1954년 9월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시카고 한인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면서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 개렛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연구하고 1956년 6월 졸업하였다.

미국에서 배편으로 귀국하여 1956년 7월에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1956~1962)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8세로 한참 일하기 좋은 때였다. 그는 쾌활하고 명쾌하였으며 진취적이고 활동력이 강한 리더십을 소유하고 있었다. 내리교회에 바로 부임하여 건축이 중단된 교회를 완공할 수 있도록 교인들을 이끌어가면서 그의 젊고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윤창덕 목사는 매주일 임원회를 소집하여 힘차게 고삐를 조이며 한편으로는 강단에서 불과 같은 열정으로 설교하고 기도하며 주마가편으로 교인들과 함께 예배당 짓는 일에 먼저 뛰어다녔다. 그의 신앙은 상당히 영적(Spiritual)이었으며, 성격은 외모와 달리 주도면밀한 편이었다. 교회 부흥의 비결은 바로 새벽제단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본 그는 매주일 설교에 새벽기도를 강조하였다.

그의 목회의 출발점과 핵심은 신령한 은혜와 기도에 힘쓰는 데 두었다. 영적인 면은 항상 뜨거워서 자주 집회도 인도하지만 머리는 차가워서 계획과 조직이 치밀하게 움직이는 목회를 운영해 갔다.

인천서지방 감리사로 시무하다가 1962년 7월 3일에 열린 감리교회 제9회 총회에서 이환신 감독이 선출되면서 그도 교단본부인 총리원의 전도국 총무로 피택되어 감리교회 성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5년 5월 16일부터는 시온교회를 담임하며 예배당을 건축, 봉헌하면서 교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1967년 4월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열린 동부연회에서 과반수가 넘는 표로 연회장에 당선되었고, 1968년 온양선교정책협의회의 제3분과 각 기관사업 및 선교사인사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온양선교정책협의회는,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는 선교수혜국으로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지만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교회에서 탈바꿈하여 자주성과 독립성을 가진 교회로서 국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원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자립적 노력을 미국 선교부와 협의하고자 하는 협의체로, 온양 관광호텔에서 모여서 협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온양선교정책협의회에서 제1회 협동선교정책협의회의 정책으로 당시 감독이었던 변홍규 감독을 회장으로, 서기에 라사행ㆍ박대인, 선교부 대표에 스탁웰, 부총무ㆍ저머니, 총무ㆍ스미스, 총무ㆍ해링톤 여선교회장을 선출하였다. 또 4개 분과로 나누어서 제1분과는 한국 교회와 국외관계와의 관계를, 제2분과는 재정 및 재산관리를, 제3분과는 각 기관 사업 및 선교사 인사관리를, 제4분과는 한국 교회와 연합사업관계를 담당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1970년 10월 23일 총회 제8차 회집에서 감리교회 제11대 감독으로 선출되어 시온교회를 떠나 감독직을 수행하였다.

윤창덕 목사가 온양선교정책협의회에서 활동하였던 경력은 바로 감독이 되어 나타났는데, 이미 선교국 설치에 대해서는 온양협의회에서 합의된 사항이었지만 윤창덕 감독은 그 선교활동에 힘을 실어 전도국을 선교국으로 개편하여 선교정책과 사회정책, 문서전도정책부의 세 부서를 두어 이전의 전도국에서 내외지에 전도사업을 장려하던 좁은 사업의 개념을 넓혀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에 입각한 \"인간생활의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넓은 의미의 선교 또는 전도사업을 실행하였다. 1971년 미국 서남대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D.D)를 받았다.

감독 은퇴 후에는 성산교회를 담임하다가 197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애리조나 훼닉스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82년 3월 25일 서울연회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1985년 9월 미국에서 별세하여 9월 2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추도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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