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윤성범(尹聖範, 1916. 1. 13~1980. 1. 12)
강원도 울진에서 윤태현(尹兌鉉) 목사와 장구규(張求圭)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 1927년 수원 남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7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1941년 동지사(同志社)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으며 그 해 이희영(李熙永)과 결혼하였다. 1941년부터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여 홍천ㆍ이천 등지에서 시무하였고 1945년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되었다. 1946년부터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이후 별세하기까기 봉직하였다.
1954년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바르트(K. Barth)에게 직접 수학하였고, 1954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계속 감리교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해방 후 신학도들은 모두가 미국 유학을 꿈꾸던 시대였다. 더구나 감리교의 십자군 장학금은 다른 생각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윤성범은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6.25한국전쟁을 겪은 그는 당시 신설된 제네바의 에큐메니컬 학원으로 갔다(1953). 한국 신학도로서는 첫 유럽 유학생이 된 것이다. 그 후 2년 만에 바젤대학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마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유럽 신학박사 제1호의 명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현대신학의 상징인 칼 바르트 교수의 제자라는 데서 그의 명성은 한국 신학계뿐 아니라 일반 문화계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그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본래 모험적인 개척정신이 있었다. 그가 해방 후 황폐한 신학교를 열고자 뛰어든 것이나, 유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 그러할 뿐 아니라, 생소한 종교학계에 뛰어들어 한국학에 손을 뻗치기 시작한 모든 것이 그의 개척정신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의 또 다른 공헌은 신학 논문을 이끌고 일반 문화계로 뛰어들었다는 데 있다. 그의 논문이 발표된 곳은 신학잡지보다도 일반교양지인 〈사상계〉와 〈세대〉였다. 또한 그의 역서의 대부분은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이것은 일반 문화인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은 그가 단군신화 문제를 끌고 신학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는 1963년 〈사상계〉에서 \"환인, 환웅, 환검은 곧 하나님이다\"라는 표제를 내걸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계뿐 아니라 만인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천도교는 기독교의 한 종파\"에 불과하다고 단정함으로써 한때 천도교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면을 통해 논쟁을 거듭하는 동안 한국 문화계는 기독교에 눈을 떴으며, 그의 사고는 전진을 하였다.
한국 신학계의 논문들은 1957년 〈기독교사상〉의 창간과 더불어 출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성범 역시 1957년 이후 40여 편의 논문을 〈기독교사상〉을 통해 발표했다.
조직신학자라 하지만 그의 대부분의 논문은 선교학에 속한 문제들을 다룬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학적 조직신학을 다루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논문이 \"한국 신학 방법 서설\"이다. 비록 이것이 형식적인 방법론이요 서설이기는 하나 그의 신학과 사상의 골격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신학 용어에 있어서 한국말을 사용하였다. \"감론\", \"솜씨론\", \"멋론\"이 그것인데, \"감론\"이란 주어진 \"씨\"로서의 복음과 이를 받아들이는 \"자리\"로서의 한국의 문화적 a prioior에 대한 소론이며, \"솜씨론\"이란 복음과 자리 또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론이다. \"멋론\"이란 멋이란 솜씨로 인해서 일어나는 하나의 아쥐메트리의 미적 표현을 이름한다. 즉 \"감론\"이 창조론에 해당된다면, \"솜씨론\"은 속죄론에, 그리고 \"멋론\"은 구속사로 볼 수 있다.
윤성범의 한국 신학 방법론은 다음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올바른 한국 신학의 수립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과 한국 고유한 문화사적 전통과의 결합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결합은 틸리히의 입장에서는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달리는 한국 신학의 토착화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구상하게 된다는 말도 된다.\"
1970년대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러한 종교사적 유산과 기독교와의 만남 속에서 한국적 신학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0년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장이 되었고 1977년 제11대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국제종교사학회 실행위원으로 피선된 이래 1960년 서독에서 개최된 제10회 국제종교사학회, 1965년 미국에서 개최된 국제종교사학회, 1975년 영국에서 개최된 제13회 국제종교사학회에 참석하였으며, 1970년 한국종교사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77년 한국기독교학회 회장, 1979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이사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그는 1980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동안 변동 없는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와 학장직을 보전함으로써 한국 신학교육계에서는 원로에 속하는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감리교신학교의 쓰고 단맛을 모조리 몸으로 겪은 역사서의 한 토막이기도 하다.
1980년 1월 22일 뇌일혈로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장례는 감리교신학대학장으로 엄수되었고 유해는 일산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역서:오토의 《종교입문》;야스퍼스의 《철학입문》;브루너의 《종교철학》;어거스틴의 《신국》, 《고백》;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저서:《기독교와 한국사상》, 대한기독교서회, 1964;《성의 신학》, 서울문화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