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윌리엄즈(Frank Earl Cranston Williams, 1883. 8. 4~1962. 6. 9)


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우리암(禹利岩)

미국 콜로라도 주 뉴윈저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덴버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그 해 여름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그는 도착 이듬해(1907) 공주에 파송되어 1940년까지 근속하였는데 이것은 내한 감리교 선교사 중 한 지역에 가장 오래 머문 예가 되었다.

1906년 당시 공주는 경기도 이천 광주구역을 포함하여 공주지방으로 승격되었고 감리사는 스웨어러 목사가 담당했으며 1906년에 내한한 윌리엄즈가 공주에 파송되었다. 그는 그 해 10월 명선학교를 영명남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오늘 영명고등학교로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907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당시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던 부흥운동이 남쪽에서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윌리엄즈 역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07년에는 경기도 여주에서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강사는 주로 선교사들이었다. 1908년 케이블이 천안ㆍ공주지방 사업을 보고하는 글에 의하면 테일러(C. Taylor)와 윌리엄즈, 버딕(G.M. Burdick) 등 세 선교사와 함께 1908년 1월에 여주지역에서 사경회를 열었다. 부흥회 상황을 이렇게 보고한다.

\"저녁 집회는 부흥회를 열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셔서 회개와 고백이 잇달았다. …… 신도들은 큰 번민 가운데 그들의 죄를 눈물로써 회개하고 예수 안에서 용서와 평안을 얻었다. 성경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깨끗해지는 경험을 했고 사경반이 끝날 때는 1백 명 이상의 신도들이 죄의 용서와 성령의 확신을 가지고 새로 거듭나게 되었다.\"

윌리엄즈는 또한 4월 8일부터 공주에서 안창호 목사와 함께 1주일 동안 부흥회를 열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부터 교인들의 자복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하며 간음하였다 하며 속이고 도적질하였다 하며 우리 주를 입으로만 믿었다 하며 어떤이는 그간에 안창호씨를 원수같이 보았다 하며 슬피 애통으로 서로 서로 용서함을 받으며 서로 위로하며 날마다 이와 같이 일주일 동안을 지냈다.\"

그는 학교 일로 바쁜 중에도 충남지역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는데 공주를 비롯, 천안ㆍ홍성지역이 그의 관할 구역이었다. 1908년 당시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편지나 표가 있으면 일본군 작전지역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피의자들을 석방시킬 힘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윌리엄즈의 증언이다.

\"이곳에서 의병(Righteous Army)이 비록 공주 40리 바깥에 머물기는 했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지방 전체가 이들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때로는 일꾼들을 시켜 벽돌을 가지러 보낼 수도 없었으니 일본군들이 강제 노역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매일 교인들이 내게 와서 일본군 장교에게 보여줄 편지나 \'표\'를 달라고 했는데 그걸 가지고 가서 억울하게 체포되어 매를 맞고 있는 사람들을 석방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한국인들에게 동정심이 갈 때가 많았지만 한 번도 그들을 도와준 적은 없었다. 아직 나에겐 이런 문제를 해결할 만큼 오랜 경륜이 없는 것 같다.\"

그는 특히 농촌교회를 위한 실제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학교에서도 농촌지도자 배출에 역점을 두고 교육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영명학교를 영명실수(永明實修)학교로 개편, 실업(농업)교육을 한층 강화하였다. 1940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귀환당한 후 인도로 부임, 가지아바드(Ghaziabad)에 있는 농업학교에서 봉직하였다.

1945년 8.15해방 후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다시 내한하여 활약하게 된다. 또한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윌리엄즈 목사와 윔스 목사의 아들인 윌리엄즈 소령, 윔스 대위는 1945년 10월 5일에 임명된 11명의 미군정 행정고문 중에 6명이 기독교인이며 그 중 3명이 목사로 임명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45년 12월에는 미군정청의 국장대리 또는 국장에 한국인을 기용하였다. 이때 정일형 목사는 인사행정처장에, 영명학교 출신인 조병옥은 경무부장에 임명되었고, 류형기 목사는 조선인쇄주식회사 관리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의 자문기관으로 1946년 2월 14일에 발족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정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윌리엄즈와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다시 선교사직에 복귀, 일본 나가사키에 부임하여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학교 재건에 전력하였다. 이후 1954년 캘리포니아에서 은퇴하였으며, 1962년 샌디에이고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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