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오기선(吳基善, 1877. 4. 21~1946. 4. 5)


독립운동가

평남 강서군 함종읍에서 대대로 비교적 부유했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7세 때 관비생이 되어 평양으로 유학을 떠나서 구학문과 신학문을 익혔다.

당시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으로부터 해방되고 문호개방과 동시에 새로운 문물이 조수같이 밀려들었다. 각 방면에 걸친 급격한 개혁이 불가피했고, 정부에서는 이러한 개혁을 담당할 만한 인력을 배출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에게 새 교육을 실시할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는데 주로 외국인 선교사였다. 지방에서도 똑똑한 젊은이들을 모아서 돈을 주어가면서 가르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소위 관비생이라고 했다. 20세에 관비생의 공부를 마치고 고향 함종으로 돌아왔다. 관비생의 공부를 마치면 도관찰사의 명을 받아 지방의 말단관직으로 부임하게 되지만, 오기선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관직생활은 하지 않았다.

그가 고향을 떠나던 해에 여전도인으로 유명한 전삼덕(全三德) 부인의 노고로 여학교가 설립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겨우 몇몇의 여아에 불과했다. 오기선은 전삼덕 부인의 전도를 받아 함종교회에 출석하며 함종에 남자들을 위한 사립소학교를 설립, 직접 교장이 되어, 제2세의 교육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만 해도 교역자가 무척 부족했다. 오기선은 당시 감리사였던 선교사 노블(W.A. Noble)의 눈에 들게 되어 1908년에 의해 함종교회 전도사로 정식 파송받았다. 이듬해인 1909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 입회하였으며 그 해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오기선은 1911년 12월 20일 협성신학교 3년제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때 같이 졸업한 이가 38명이었으며 당시 교장은 하디(Robert A. Hardie, M.D) 박사였다.

오기선은 열심 있고 부지런하고 충성을 다하는 목회자였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로 한결같았다. 1912년 졸업한 이듬해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해주읍교회로 파송되어 1년간 훌륭하게 치리해서 부흥시켰다. 1912년 서울 동대문교회로 전임되었으며 그곳에서도 교회를 부흥, 발전시켰다.

1913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YMCA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YMCA 이사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YMCA조선연합회가 창설될 때 그 연합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도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도쿄YMCA가 조직되고 그 안에 한인연합교회가 설립되어 본국에 목회자 파송을 요청하자 장로교와 감리교는 번갈아 목회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는데 주공삼 목사 뒤를 이어 1914년 오기선 목사가 파송을 받았다. 일본에서 2년간 최승만ㆍ백남훈 등과 함께 도쿄YMCA를 지도해 나가다 1916년 귀국하여 평양과 진남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고 1917년 인천지방 감리사가 되어 1920년까지 4년간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박희도ㆍ오화영ㆍ정춘수와 함께 감리교 지도자와 YMCA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데 참여하였고 특히 천도교와의 연합운동에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 한국 감리교회 대표로 미감리회 4년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노블과 함께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1년 귀국한 후 다시 도쿄한인교회 6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칸토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한국인들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는 참상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도쿄YMCA 총무 최승만과 재해동포위문단을 조직, 본국 교회와 연락을 맺으면서 피살자 가족 위문 및 복구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4년 귀국해서 평양 남산현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1928년부터 은퇴하기 전해인 1934년까지 평양지방 감리사로 활발한 활약을 하였다.

1926년부터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통합되던 시기까지 남북감리연합방침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실질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25년 남감리회 총회는 미감리회와의 합동을 부결시켰으나 한국 감리교회 대표들은 조선 남.북감리교회라도 단독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두 교회에서 정식으로 연구위원을 선임하기로 하였다. 1926년 6월에 열린 미감리회 제19회 조선연회에서 \"남북감리연합방침연구위원\"으로 김찬흥(金燦興), 오기선(吳基善), 노블(W.A. Noble), 김종우(金鍾宇), 모리스(C.D. Moris) 등 5명을, 같은 해 9월에 열린 남감리회 제7회 조선연회에서도 \"남북감리연합기성위원\"으로 신공숙(申公淑), 양주삼(梁柱三), 정춘수(鄭春洙), 저다인(J.L. Gerdine), 갬블(F.K. Gamble) 등 5명을 각각 선출하여 두 교회 합동으로 연구케 했다.

1934년 남산현교회에서 근속 10년 표창을 받았는데 당시 파송제로 한 교회에서 10여 년을 목회했다는 것에 대해서 남산현교회에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며 오기선 목사를 축하해 주었으며, 〈감리회보〉에서도 \"오기선 목사 근속 10주년 기념식\"이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하오 1시에 평양 남산현교회당에서 오기선 목사 남산현교회 근속 1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었다. 감리교회가 조선에 선교되여 오십년을 경과한 오날에 매년 파송제를 갖인 제도밑에서 같은 교회에 같은 목사로 십년을 계속하여 파송을 받고 꾸준히 충성을 다하시여 성역에 근무하심은 (오기선 목사)씨가 조선감리교회의 최초의 신기록을 지였다 하여 일반교우는 물론 사회유지제씨의 열광적 환영으로 기념축가식을 성대히 개회하고…….\"

근속표창을 받고 난 이듬해 이윤영 목사를 후계자로 세우고 일선 목회에서 은퇴하였다.

1935년부터 서부연회 자치 사업부 총무로 활동하였고, 1937년에는 총리원 전도국 사업 담당으로 만주지역에 있는 교회의 실상과 감리교회를 떠나 독립된 교회로 새롭게 창립된 \"조선기독교회\"를 조사하기 위해 6월 16일 경성역을 출발해서 7월 13일까지 약 한달간 교육부 총무 류형기 목사와 함께 만주지역을 여행하기도 하는 등 전도사업에 매진하다 1939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 황해도 백천에 있다가 해방이 되자 월남하여 북아현동 아들의 집에 머물던 중 1946년 4월 5일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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