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여메례(余袂禮, 1872. 2. 22~1933. 2. 27)


근대여성교육가. 세례명은 메리(Mary). 남편의 성을 따 황메례(黃袂禮), 양메례(梁袂禮)라고도 불렸다

경남 마산 여(余)씨 가문의 외동딸로 출생함. 그의 부모는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와 함께 있으면 단명(短命)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와 그를 이화학당의 스크랜턴 대부인(M.F. Scranton)에게 양녀로 보냈다. 이화학당 초기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세례를 받아 \"메리\"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영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집에 살면서 상동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정동에 있는 여성병원 보구여관(保求女館)에서 홀 부인(R.S. Hall)의 조수로 근무하였다. 1899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황(黃)씨 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였으나 3개월 만에 남편은 혼자 미국 유학 길에 올랐고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과부가 된 그는 보구여관 일에 더욱 몰두하여 홀 부인에게 \"우리의 더없이 신실한 전도부인이며 병원 조수\"라는 칭호를 받으며 병원 일과 전도에 전념하였다. 1900년 홀 부인 가족이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정동교회와 이화학당에서 여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01년 정동교회 여성 63명을 규합하여 보호여회(保護女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교회 여성의 첫 조직체로서 오늘날 \"여선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또한 1903년에는 이화학당 안에 학생 자치단체인 \"러빙 소사이어티\"(Loving Society)를 창설하였다.

1903년 3월, 여메례는 일본을 시찰하면서 일본의 현대식 여성교육기관을 돌아보게 되었다. 일본 여성교육기관들의 활발한 활동에 감명을 받고 돌아온 그는 1904년부터 스크랜턴 대부인이 담당하고 있는 상동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엡윗여자청년회를 새로 조직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또한 스크랜턴 대부인의 권고로 수원에 있는 삼일여학교에 가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의 인기가 높아 40명의 학생이 계속 그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서서히 선구적 교육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에게 원대한 교육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상동교회에서 가르치는 학생 중에 엄씨 성을 가진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부친이 당시 고종 황제의 후비(後妃)인 엄비(嚴妃)의 사촌동생인 엄준원(嚴俊源)이었다. 당시 엄비는 근대식 여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엄준원은 딸의 선생님이었던 여메례를 엄비에게 소개하였고, 진취적 사상을 가지고 있던 엄비와 개화여성 여메례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에 근대식 여학교 설립 계획은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자하골(현재 창성동) 1천여 평 토지와 큰 기와집을 하사하여 진명(進明)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여메례는 1906년 4월 21일 개교한 진명여학교의 학감(學鑑)으로 취임하였으며 학교 운영의 실질적인 업무를 맡아 처리하였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기울어져가는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어전 통역관이 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통역을 하기도 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1907년 7월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왕실의 보조를 받던 진명여학교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식민지 교육기관이 되었고, 여메례도 학감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한동안 방황하던 그는 배재학당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학생 민주단체인 협성회(協成會) 회장으로 1898년 〈협성회회보〉를 발간하였던 개화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양홍묵(梁弘默)과 재혼하였다. 관리였던 남편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던 여메례는 결혼한 지 5, 6년 만에 남편이 별세하자 두 번째 과부가 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양홍묵의 전처 소생인 어린 양현채를 데리고 양홍묵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芙江)이란 곳에 정착하였다. 이때 동양선교회 창설자 길보른(E.A. Kilbourne)과의 만남이 이루어져 여메례는 성결교회 여전도사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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