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양우로더(梁雨路德, 1887. 8. 16~1943. 6. 6)
우로더란 이름은 그가 세례받을 때 얻었던 영어 이름 로다(Rohoda)를 그 당시 발음대로 표기한 것이다.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집은 조선초 문신 양성지(梁誠之)의 가문으로 그의 부친 양봉환(梁奉煥)은 전통 양반이었다. 그러나 수구적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양우로더의 남동생 양재창(梁在昶)이 배재학당 초기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다.
초기 생애는 유복한 집안의 딸로 평범한 생활이었으나 19세 때 출가하면서 불행하였다고 한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이름이 \"최로다\"(Choi Rhoda)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씨 집안에 시집간 것으로 보이는데, 〈기독신보〉에 실린 그의 약력 중에 보면 \"십구세에 출가케 되엿다. 하느님께셔 당신 나라의 그릇으로 쓰시랴고 부르심이던지 그는 인생의 락이라는 가뎡생활을 떨쳐 바릴슈밧게 업시되엿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가 겪은 불행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한다. 불행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파탄당한 가정, 이것이 그가 겪은 첫 시련이었다.
이 무렵 동생 양재창은 배재학당에 다니며 남대문 안에 있는 상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양재창은 불행을 당한 누나에게 신앙생활을 권면하였다. 물론 집안에서 반대도 있었지만 동생이 부모님을 설득했다.
\"처음 쓰개치마를 쓰고 교회문 안에 들어설 때는 매우 서먹서먹하였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본즉 도저히 그대로 집에 들어앉을 수가 없어 집회에 빠지는 일이 없이 나가게 되는 고로 얼마 안가 상동예배당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름을 우로더라 하였다.\"
양우로더가 상동교회 세례교인이 된 것은 1907년 이후로 볼 수 있다. 이 무렵 상동교회 안에서는 스크랜턴 부인이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있었다. 단순히 성경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글 및 한국 역사도 가르쳤고 금방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하란사를 교사로 불러 들여 영어까지 가르쳤다. 양우로더는 전덕기 목사의 추천을 받아 이 학교 학생이 되었다. 이 학교는 1908년에 앨벗슨(M.M. Albertson)이 교장이 되면서 신학교 체제를 갖추고 부인성서학원으로 정식 출발하였다.
기독교를 통해 새 삶을 얻게 된 양우로더는 보다 적극적으로 살기로 했다. 시간을 내어 서울 근방에 전도하러 나갔다. 남대문 밖 연화봉(현 청파동)에다 먼저 학교를 세웠으며, 한성부 주사로 있는 동생이 재정적으로 크게 도왔다. 여자아이 서너 명으로 학교를 시작하니 미국인 여선교사들도 적극 돕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연화봉여학교가 1908년에 설립되었고 이어 그곳에 교회도 설립되어 상동교회 지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청파동교회에 흡수(1939)되어 없어졌지만, 이 연화봉교회와 연화봉여학교야말로 양우로더 남매에 의해 이루어진 귀중한 신앙의 열매였다.
1921년 3월 5일, 그는 부인성서학원을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때 졸업 동기로는 손메례, 신알베터, 박마불 등이 있다. 양우로더는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그 학원의 전도부인이 되어 학생들의 신앙지도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특히 매주일 학생들을 이끌고 서울 근교로 나가 전도하였고, 시골의 작은 교회 주일학교도 도왔다. 연화봉교회를 새로이 건축하는 등 바쁜 일과 속에서도 성서학원 학생들과 함께 서울 근교에 나가 전도하고 교회 여성들을 지도해야 했다. 김포의 밭은골교회와 염창교회, 창의문밖교회 설립은 그의 전도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그는 1920년 4월에 성서학원을 떠나 자신이 설립한 염창교회 전도부인으로 파송받아 2년간 시무하였고, 다시 1922년에는 종로중앙교회로 옮겨 그곳에서 2년간 시무하였다.
1924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총회는 만주에 여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미감리회 여선교회는 만주에 파송할 선교사를 물색하던 중 이제는 노련한 전도인으로 성장한 양우로더를 적임자로 택하게 되었다.
양우로더는 선교사가 되어 1925년 1월 1일에 만주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당시 북만주에는 미감리회 소속 목사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 목회자들은 대부분 3.1운동을 전후해서 만주로 망명해 갔으며 손정도ㆍ배형식ㆍ동석기ㆍ최성모 목사는 특히 독립운동과 관계가 깊은 인물들이었다.
양우로더는 만주에 가서 우선 지역 교회를 순방하며 여선교회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보호여회(保護女會) 조직에 착수하였다. 보호여회는 여성 교인들의 자치기구로 교회 안팎에서 조직적인 선교활동을 펴나가는 기본조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때 서울에서 부인성서학원 교사로 학생들을 이끌고 전도하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만주 선교만큼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우리 손으로 먼저 시작하였다. 양우로더는 불모지 상태였던 만주의 여선교사업을 개척하고 3년 만에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로 여선교회는 이베세, 박순신, 이매련, 이복녀, 남경순, 이일심 등을 선교사로 보내 해방되기까지 만주 선교를 계속하였다.
3년 만에 서울에 돌아온 양우로더는 자신이 설립한 연화봉여학교가 경영난에 빠져 폐교 지경에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전도부인직을 내놓고 학교를 살리는 일에 매달렸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성서학원 동창 손메례를 비롯하여 이상옥ㆍ허택ㆍ예종석ㆍ배운영 등을 규합, 부인친목회를 조직하고 40여 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그 회비로 교육비를 충당하기도 하였다. 양우로더는 자신의 사재를 학교에 모두 희사하였고, 오직 학교 발전만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성악가 김자경\"김천애 등이 이화여전 재학중 이 학교에 나와 봉사하기도 했다.
그가 설립한 연화봉교회도 꾸준히 발전되다가 같은 지역 안에 남감리회에서 세웠던 용산교회와 1938년 합해져 청파동교회가 되었다. 그 후 청파동교회 본처전도사(장로)가 되어 교회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그는 일제 말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연화봉여학교 설립자 겸 교장으로 학교를 지키다가 1943년 3월, 제23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그 해 6월 6일 별세하였다. 초년의 불행했던 결혼생활 속에서 신앙으로 좌절을 극복하고 전도인으로, 교육가로, 여성선교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신앙인이었다. 그가 설립한 연화봉여학교는 해방 후에 신광여자중ㆍ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