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안성호(安聖鎬, 1890. 3. 23~1969. 2. 16)


독립운동가

1890년 충남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태어났다. 개인서숙에서 16세까지 한학을 수학한 후 1906년 입교하면서 공주 영명소학교에 입학, 1913년 같은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였으며 곧바로 도일하여 일본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에 편입, 고등과를 거쳐 1919년 3월 신학부 1년을 수료하였다. 이때 3.1운동을 맞아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하여 영명학교 동문들을 중심으로 공주지방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가 그 해 4월,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다시 아오야마학원에 복교(1920. 4)하여 1922년 3월 졸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4월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으로 취임했고, 1924년 4월 경남 마산 호신고등보통학교로 전임되어 1927년까지 봉직했다.

한편 그는 1922년 충남 음성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1922~1923), 1930년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중부연회 정회원으로 허입되었다. 이후 청양(靑陽) 및 보령교회(1928~1933), 예산교회(1933~1934), 부여교회(1934~1935), 강경(江景)교회(1935~1937), 예산교회(1937~1939), 삽교교회(1939~1942), 천안교회(1942~1943), 공주교회(1943~1945), 논산교회(1945~1946), 연산교회(1946~1947), 의성교회(1947~1952), 은진교회(1952~1954), 천안 제1교회(1959~1961) 등지의 담임목사를 역임하고 1961년 3월 은퇴하였다.

그는 주일학교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홍성지방과 공주지방 주일학교부 총무 등을 역임하며 아동교육과 기독교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1930년 〈기독신보〉에 기고했던 \"아동과 종교교육\"이라는 글에서도 그의 교육관이 잘 드러난다. 안성호는 당시의 성적 제일주의로 흐르는 주입식 교육에 대해 반대하며, 어린이들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아이들을 더욱 수동적이며 주입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에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종교교육을 통해 신비적 체험과 믿음이 형성되고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선의지가 발동하여 남을 돕고 선한 삶을 사는 교육적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령육(靈育) 즉, 종교교육이야 말노 사람의 성정을 선량케하며, 그 안에서 소사나오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 긔초적 공사가 되여서 비로소 지육, 체육 등의 아름운 건축이 그 우에 건설되는 것이다. 사람의 교육의 근본 인성 정의 성화(性情의 聖化)를 이저버리고서 그 지엽문제인 일반적 교육문제를 의론하느여도 이것은 실노무익하지 아니한가.\"(\"아동과 종교교육\", 〈긔독신보〉, 1930. 6. 11)

그는 예산교회에 시무할 때부터(1937) 충청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고 1945년 12월부터는 연산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안 목사는 교육사업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투신했는데, 공주 영명학교, 마산 오신학교, 대전 대동여고, 논산 기민중학교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연산중학교를 설립하여 그곳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69년 숙환으로 노량진 자택에서 별세하였다(79세). 장례식은 감리교 발전을 위해 일생을 몸바쳐 온 안 목사를 애도하는 친지와 교계 인사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 2월 18일 상동교회에서 박설봉 목사의 엄숙한 사회로 진행되었다. 또한 안 목사와 친숙했던 엄재희 목사가 조사를 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함께 애통해 했다고 한다. 유해는 상동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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