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안석준(安錫濬, 1887~1947. 12. 25)
1887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1915년 2월 세례를 받고 입교한 후, 목회자로 헌신할 것을 결심한 후 192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7회). 1922년 9월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동시에 진남포교회에 첫 부임을 하였다. 1920년 진남포 비석리(碑石里)교회로 전임되었다. 이후 강서읍(江西邑)교회(1922~1930), 사리원교회(1930~1933), 영변(寧邊)교회(1933~1937), 진남포 비석리교회(1937~1942), 강서읍교회(1942~1947) 등지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특히 안석준은 사리원 및 영변지방의 감리사를 지내면서 1930년대 새로 조직된 조선 감리교회 서부연회의 선교사업을 자기가 처한 선교 현장에서 감당해 낸 일꾼이었다. 1935년 영변지방에는 6개의 구역에 31개 교회가 있었으며, 안석준 감리사 외에 14명의 교역자가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1934년의 심한 흉년으로 지방 내 각 교회의 교우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안석준 목사는 이때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한 교인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들은 육신은 흉년을 만나서 기갈이 심하나 영혼까지 흉년을 만나 먹지 못하면 참말 생명이 죽는다 하여 전보다 더 한층 사경회와 부흥회에 힘썼나이다. 그런고로 구역 각 교회는 소사경회에 더욱 힘썼으며, 2~3백리 되는 먼 길을 굶어가며 도보로 4~5일씩 걸어 대사경회에 출석한 부인들이 많았습니다.\"(〈기독교조선감리회 제5회 서부ㆍ중부ㆍ동부연회 회록〉, 1935, 135쪽)
이러한 30년간의 목회와 헌신을 통해 그가 가는 곳에선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 12월 25일 해방 후 세 번째 맞이하는 성탄절을 뜻깊게 보내기 위하여 교회 청년들이 스피커를 가져다 놓고 성탄송을 부르며 전도를 나섰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공산당에게 반동으로 몰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새벽 찬송을 부르며 다닐 때에 저들 민청원(공산청년)들은 북과 징을 치고 쫓아다니면서 방해하며 모래와 돌을 던졌다. 청년들이 잡혀가고 안석준 목사도 보위부에 호출당하여 취조를 당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박해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몸이 비교적 비대한 분이었는데, 그만 돌아오다가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도 많은 고통과 충격을 받은 이유였다. 사람들이 집으로 부축하여 온 지 30분 만에 순교하고 말았으니 당시 62세의 연세였다. 유해는 용강 선형에 교인들이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