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안경록(安慶祿, 1882. 8. 7~1945)


농촌운동가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911년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미감리회 전도사로 평양에서 목회하던 중 105인사건을 맞았다. 일제는, 1910년 음력 8월 29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여하러 가는 데라우치 총독을 선천역에서 암살코자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며 기독교 지도급 인사 6백여 명을 체포하고 선교사 23명을 연루자로 불구속 기소하였는데, 이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주모자인 윤치호, 이승훈, 임치정 등 105인에게 각각 실형을 선고하고 나머지는 불구속 처리하였다는 데서 일명 \"105인사건\"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일제의 날조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그는 갖은 고문을 받았고 결국 6년형의 징역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2년 만에 출옥(1914)한 그는 미감리회 조선연회의 학습을 받기 시작하여 강원도 영월로 목회지를 옮겼으며, 1914년 6월 7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5년 강릉교회로 전임하여 이후 10년을 강릉지방 목회에 투신하였는데 1918년에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강릉지방 감리사가 되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교회 청년들을 규합하여 강릉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즉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당시 성내리 소재) 안에 본부를 둔 강릉 청년회 회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계획하였고 4월 2일 강릉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에는 교인들이 선두로 서서 태극기를 뿌리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으며 1924년 진남포교회(신흥리 소재)로 전임하였다. 이곳에서 2년 동안 목회하였고, 삼숭(三崇)학교 설립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만주지역 선교사로 파송받아 신경 영고탑(寧古塔)교회에서 1년간 시무하였다.

귀국 후에도 황해도 수안(遂安)교회로 부임하였는데 궁벽한 산골이라 교인들의 생활이 극빈하여 그는 교회 청년들과 절제운동을 전개, 자금을 모아 사래에 공동 농장을 경영하여 농촌 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그는 일선 목회를 떠나 농장 경영에 몰두하면서 지방 교회를 돕고 부흥회를 다니기도 했다. 1940년 맏아들 예겸(禮謙)이 감리교신학대학 4학년 재학중 갑자기 사망하자 정신적 충격을 받아 홍제 목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목장을 경영하면서 홍제교회를 돕기도 하였다. 해방되기 3개월 전인 1945년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으나 현재는 장녀 숙겸(淑謙, 한성교회)과 병겸(秉謙, 성광교회)만이 있을 뿐이고 손자로는 종혁(鍾赫, 판사) 등이 있으며 외손자 전삼광(全三光)은 성공회 신부로 교역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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