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 2. 6~1902. 6. 11)


미감리회 한국 개척 선교사. 한국명 아편설라(亞扁薛羅)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더튼에서 출생. 부친(Gideon)은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개혁교회 교인이었고 모친(Maira Gerhart) 역시 독일계였으나 메노나이트파였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독실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14세 때 서더튼 교외 임마누엘개혁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876년 웨스트체스터사범대학에 진학하여 수학하던 중 그곳 장로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의 체험을 했으며 그는 평생 이날(1876. 10. 6)을 제2의 생일로 기념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장로교회에 출석하였으며 1878년 부친의 뜻에 따라 다시 랭카스터에 있는 프랭클린앤드마샬대학에 진학하여 히브리어ㆍ그리스어 등 어학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회심 이후 개혁교회나 장로교회의 신앙유형에 대해 갈등을 가지고 있던 중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기도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879년 감리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1882년 신학을 목적으로 뉴저지 주에 있는 드루신학교에 진학하면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절친한 친구 워즈워드(J.S. Wadsworth)에게서 그리피스가 쓴 Korea, the Hermit Nation을 빌려 읽고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처음 선교 목적지는 한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워즈워드가 그보다 더 열성적으로 한국 선교를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1883년 10월 하트포드에서 열린 전국신학교연합회 집회에 드루신학생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해외 선교에 대한 열띤 강연을 들었으며 이때 뉴브룬즈윅신학생 대표로 참석한, 훗날의 선교동역자 언더우드(H.G. Underwood)도 만나게 되었다. 1884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는 한국 선교를 결행하기로 하고 우선 학교와 병원사업을 추진할 선교사 후보를 물색하였다. 우선 병원사업자로 의사인 스크랜턴(W.B. Scranton)이 선임되었고 다른 한 자리를 워즈워드가 개인사정으로 포기하는 바람에 아펜젤러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884년 12월 랭카스터에서 만난 청교도 후예인 닷지(Ella Dodge)와 결혼하였고 이듬해(1885) 함께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출발에 앞서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인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스크랜턴 부부와 함께 태평양 우편선인 아라빅호를 타고 2월 27일 일본에 도착하였고 3월 5일 일본 주재 선교사 매클레이의 서재에서 제1회 한국선교사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는 일본에 머무는 한달 동안 갑신정변으로 망명해 있던 박영효에게 한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본국 파울러 감독의 지시에 따라 한국선교부 부감리사로 임명받은 그는 나가사키로 가서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받은 언더우드와 합류하였고 미츠비시 선박회사의 배편으로 요코하마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였다. 그 배에는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외에 고종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묄렌도르프(P.G. Mo¨llendorf)도 끼어 있었다.

4월 2일 부산에 도착하여 하루 정박하는 동안 하선하여 처음으로 한국 땅을 거닐었고 다시 배는 제물포를 향하여 북상, 4월 5일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부활절날 제물포에 상륙한 아펜젤러는 그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은 기도문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우리는 부활절날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히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아 서울은 아직도 불안한 정세하에 있어 외국인 여자의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리공사 폴크(G.C. Foulk)의 충고대로 인천의 여관에서 일 주간을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한 달을 머물면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지냈다. 그 사이 스크랜턴이 혼자 서울에 진출하여 정동에 집을 마련하였고 아펜젤러 부부는 7월 19일에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우선 그는 폴크를 통해 학교 설립의 가능성을 한국 정부에 타진하여 국왕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8월부터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배재학당의 시초였다. 1886년에는 보다 적극적인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감리교교리서를 한글로 번역\"출판하였고 매서인을 고용해 전도를 시작했으며 자신도 배재학당 학생 등 만나는 사람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86년 부활절에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던 다카히라라는 일본인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고 이듬해에는 배재학당 학생 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87년부터는 한국 선교부 감리사가 되면서 학교ㆍ병원ㆍ복음전도의 제반 선교사업을 관장하였다. 그 해 정동에 1층짜리 양옥을 건축하여 학교교실ㆍ예배당ㆍ선교본부로 사용토록 하였으며 성경공부를 위한 별도의 집을 마련하여 \"벧엘예배당\"을 설립하고 1887년 10월 9일 첫 공중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선교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되자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지방전도여행에 나서 1888년 봄 소래를 거쳐 평양까지 순회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감리교의 존스(G.H. Jones)와 동행하여 강원도ㆍ경상도 지방을 순회하였다. 1888~1890년에 그는 전국 8도 중 6개 도의 각 지방을 순회하였는데 총 여행거리는 1천 8백 마일에 이르렀다. 언더우드와의 친분관계로 한국에서의 감-장 양 교파 선교구역 분할도 큰 마찰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1887년 선교사들로 조직된 한국성서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어 성서사업의 실질업무를 관장하였으며, 우선 성혜론 등과 협의하여 1890년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였고 1892년부터는 회장이 되어 문서사업을 관장하였다. 올링거가 맡아하던 \"감리교출판소\"까지 맡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연구지인 The Korean Repository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이었으며 자신이 시무하는 정동교회도 1897년 10월 붉은 벽돌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신축하였다.

아펜젤러는 또한 한국 청년운동에도 큰 공을 남겼다.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 귀국한 서재필과 손잡고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내에서 기독교청년운동을 벌였으며 독립협회 운동도 적극 후원하였다. 1897년 가을 정동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했고 1899년에는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서의 YMCA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01년에는 배재학교 내에 최초의 학생 YMCA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협회사건(1898)으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투옥되었을 때 옥중으로 방문, 전도하여 이상재ㆍ이승만ㆍ유성춘ㆍ김정식ㆍ홍재기ㆍ안국선ㆍ김린ㆍ이원긍ㆍ남궁억 등이 기독교인이 되는 동기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이승만ㆍ신흥우ㆍ정교 등이 그와 각별한 친분관계를 맺게 되었다.

1897년 2월 그는 한국 최초의 순한글 종교신문인 〈죠션크리스토인회보〉를 창간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도 민족계몽과 복음선교의 내용을 전하였다.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활동으로 건강이 나빠졌으며 40대의 나이인데도 외모는 노인의 모습을 나타냈다. 1900년 그가 2차 안식년을 맞아(1차는 1891년) 귀국할 때 고종 황제는 그를 특별히 불러 노고를 치하하고 선물을 내리기까지 했다. 안식년 휴가 후 귀국한 그는 새로이 구성된 미감리회 남지방회 감리사로 임명받아 서울 이남 지역의 교회들을 관장하게 되었다.

1902년 6월 1일 그는 무어 감독, 스웨어러 목사 등과 함께 서울 근교 무지내교회로 가다가 경부선 철도공사를 하던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행패를 당해 이 일로 6월 첫 주일 목포에서 열린 성서번역자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1주일 늦은 6월 11일에야 인천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조사 조한규와 목포가 고향인 여학교 학생을 데리고 일본 상선 구마가와마루를 탔으며 짙은 안개로 그가 탄 배가 군산 근처 어청도 앞바다에서 같은 일본 상선과 충돌, 침몰하며 함께 목숨을 잃었다. 다만 같은 배에 탔다가 생환한 미국인 탄광기술자 보울비가 물에 잠기면서도 함께 간 비서와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애쓰던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할 뿐이었다. 6월 29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추도예배에서는 각 선교부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사와 교인들, 외국 외교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으며, 그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1935년 정동교회 안에 기념비가 세워져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이만열 편, 《아펜젤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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