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89. 11. 6~1953. 12. 1)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의 장남으로 1889년 11월 6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수학하던 중 10세 때(1900) 아버지의 안식년으로 귀국했다가 아버지만 돌아오고 고국에 체류, 1907년 프랭클린앤드마샬아카데미를 졸업하였고, 1911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5년 드루신학교 및 1916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였다. 1917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내한, 이듬해(1918) 같은 감리교 선교사인 노블(William Noble)의 딸(루스 노블)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3년 동안 인천지방 선교사업에 종사하다가 1920년 그의 선친이 창립한 배재학교 제4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일제하의 기독교 압제와 맞서서도 굴하지 않고 배재학교 발전의 기틀을 다졌으며 1940년까지 근속하였고, 1941년 본국으로 돌아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 목사로 1945년까지 봉직하였다. 1948년 로스앤젤레스감리교회 담임목사로 근무하다가 6.25전쟁 때는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기독교세계구제회 한국 책임자로 일하였다. 그는 기독교세계봉사회의 관리자로 온 것이며, 전쟁 피난민과 고아와 과부 등에 대한 구제사업을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쏟았다. 1952년 배재중ㆍ고등학교 재단이사장에 취임, 활동하던 중 1953년 가을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에 귀환하여 뉴욕감리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 해 12월 1일 65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NCC 협동총무로도 활동이 컸던 그의 유언은 \"나의 뼈를 나의 고국이요 사랑인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기독교연합회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에 전해 온 그의 장례식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나서 65평생을 한국과 한국민과 한국 교회를 위하여 가장 선한 친구로, 가장 착한 지도자로, 가장 귀한 목자로 봉사하던 고 아펜젤러 박사의 최후를 영결하기 위한 장례식은 12월 2일 수요일 오후 미국 뉴욕시내 감리교회에서 미망인과 아들과 그의 형제인 두 아펜젤러 박사와 한국인 교우와 한국 관계자들과 미국 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젠센 박사(6.25전쟁 당시 개성에서 납치되었다가 앞서 석방되어 귀국한 감리교 선교사)의 사회로 엄숙히 진행되었다. 특히 웰치 감독과 베커 감독이 장례식을 보좌하였다.
60여 년 전에 한국에 건너가 복음의 터전을 같이 개척하던 언더우드가와 아펜젤러가의 교분은 그대로 한국 교회사의 한 토막을 이루고 있거니와 이날도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고 아펜젤러 박사의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봉사한 생애와 역사를 보고하였고, 리차드 언더우드 부인은 독창을 하였다. 식은 한인교회의 윤응팔 목사의 축도로 폐회되었다. 아펜젤러 박사의 유해는 그가 나고 그가 생애를 바쳐서 사랑하던 한국 땅에 보내어 묻기로 하였다.\"
아펜젤러 박사의 화장된 유골은 그의 유언에 따라 젠센 목사의 품에 안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20일 오후 2시 그가 일생을 보낸 정동교회에서 배재학교와 기독교세계봉사회 공동주최로 장례식이 다시 엄숙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골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로써 아펜젤러 1세와 2세 두 사람은 한국을 위해 그들의 혼신을 다 바친 후 한국 땅에 고이 잠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