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신흥우(申興雨, 1883. 3. 26~1959. 3. 15)


사회운동가. 호는 금하(錦霞)

충북 청원군 남성면 묵정리에서 신면휴(申冕休)와 김씨 부인 사이에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학자인 부친에게서 한학을 수학한 뒤,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 서재필ㆍ윤치호 등에게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고 1898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897년 부모의 뜻에 따라 2년 연상인 이재규(李梓奎)와 결혼하였고, 1899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1901년에 덕어(德語, 독일어)학교에 들어가 어학공부를 하였다. 한편 1898년 말 협성회와 독립협회 임원들의 체포 이후 학생운동이 큰 타격을 입은 가운데, 덕어학교 재학 시절 그가 중심이 되어 다시 학생회를 조직하고 개화사상과 독립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벌이자 영어학교, 일어학교 학생들까지 합세하여 기세가 높아졌고, 이에 정부는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를 영입하려 한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 1902년 1월 징역 3년을 선고하고 한성감옥에 가두었다. 여기서 그는 성서와 찬송가, 기독교서적을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았고, 영문서적을 읽으며 실력을 쌓았다. 또한 이승만, 성낙준, 양의종과 함께 옥중학교를 열고 영어, 지리, 문법을 가르쳤다.

1903년 출옥 후 곧 미국으로 건너가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입학, 예과 2년을 마치고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비가 너무 많이 들어 도중에 그만두고 문리과대학으로 전과하였다. 1910년에 학사, 1911년에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유학중이던 1908년 아내를 초청하여 함께 셋방살이를 하면서 1909년 맏딸 보석을, 1911년 둘째 딸 보옥을 낳았다.

귀국 후 곧 미감리회 선교부의 요청으로 1911년 6월에 모교인 배재학당 학감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 최초의 한국인 학당장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에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제7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한국의 주일학교는 교회와 일체가 되어 있음을 역설하였다. 1916년에는 배재학당의 고등보통학교로의 개편에 따라 교장이 되었고, 1918년에는 〈배재학보〉를 창간하였다.

한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때 그는 평양 기홀병원에 치질과 이질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하였다. 이미 1916년 총독부의 교육정책에 순응하여 배재학당을 배재고보로 개편할 때부터 친일파라는 의혹을 받아왔던 터인지라, 사람들은 일제와 내통하여 계략을 꾸민다고 생각하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사들이 병원에 찾아가 학교 일을 의논하려 했으나 그는 일체 면회를 사절하였고, 배재 학생들이 헌병들에게 잡혀가는 등의 사건 속에서도 병원에 누워 모른 척하고 있었으며, 최근 공개된 노블(Mattie Wilcox Noble) 선교사의 일기 \"3.1운동, 그날의 기록\"에 의하면, 3월 2일에 \"일본과 한국은 공동으로 움직일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으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내용과 함께 이완용, 조충웅, 김임식, 송병준, 임태영, 신흥우 등이 서명한 \"조선국가협의회\" 명의의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고 한다.

반면 1919년 3월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 한국의 3.1운동에 관해 진술하고 이를 석달 동안에 집필, \"한국의 갱생\"(The Rebirth of Korea)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여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에 귀국한 그는, 한 사람을 제외한 교원 모두가 서명한 파면요청 연판장을 접수한 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1920년 1월 권고사직을 당하였다.

배재학교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YMCA운동에 투신하였다. 1912년부터 이사직에 몸담고 있던 중앙YMCA의 총무로 선임된 것이다. 1923년 일본YMCA에 속한 한국YMCA를 독립시켰으며, 1924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YMCA세계동맹에 정식 가입시켰다. 또한 클라크(F.C. Clark), 번스(H.C. Bunce) 등 외국의 저명한 농업전문가를 초빙해 농촌부흥에 노력하였으며, 덴마크식 농민학교와 협동조합을 조직\"확대해 나갔다.

그는 1926년 2월 서울YMCA회관에서 기독교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YMCA연합회에서 교회진흥운동을 벌인 바 있는데, 그 후 이 양자를 발전시켜 1932년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초교파적 일치, 토착화, 반선교사 사상, 계급타파 및 노동운동적 조항 등이 이면에 깔린 신앙운동을 보수 세력이 용납할 리 없었다. 결국 감-장 모두가 이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1935년 적극신앙운동은 종말을 고했으며, 그 또한 YMCA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1938년 명맥만을 유지하면서 사실상의 활동을 정지한 흥업구락부(1925년 결성)에 난데없는 검거열풍이 불어닥쳐 검속당한 이후, 그는 일제의 회유에 의해 창씨개명과 친일강연회 등 노골적인 친일행각에 동참하였다. 한편 이듬해인 1939년 9월 아펜젤러 2세의 후임으로 다시 배재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태평양전쟁 직전 스스로 교장직을 사임했다.

해방 후 1948년 7월, 영자신문 The Union Democrat를 창간하여 편집자 겸 주필로 활동하였고, 1950년 1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주일특명전권대사 겸 주일연합군 최고사령부 파견 외교사절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4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고배를 마셨고, 6.25전쟁 중인 8월에 도미, 1951년 2월 미국에서 《살길을 찾아서》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1952년 4월 귀국하여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1954년 7월 대한YMCA연합회 고문총무로 추대되어 다시 청년운동에 나섰고 1955년 1월 \"그리스도 청년의 보국운동\"이라는 제목으로 4대 강령을 발표하는 등 자못 활기찬 기독청년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1957년 7월 민주당에 입당, 고문에 추대되면서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The Korea Times, 〈한국일보〉 등에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하던 중 1959년 3월 15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서 만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저서:《한국의 갱생》(The Rebirth of Korea), 1919;《살길을 찾아서》, 1951.

-참고문헌:전택부, 《인간 신흥우》, 대한기독교서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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