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신홍식(申洪植, 1872. 3. 1~1939. 3. 18)


독립운동가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仁次里)에서 신기우(申驥雨)의 2남으로 출생. 한문 수학을 거치고(1878~1992) 난 다음 1913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2회). 한말의 국운을 걱정한 나머지 30세 되던 해(1901)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교를 통한 구국운동에 전념, 1906년부터 충북 보은군 보은교회 권사로 목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애국정신 고취에 투신하게 되었다.

1909년 충남 청원군 직산면 직산(稷山)교회 전도사로 전임되었으며, 신학교 졸업하던 해(1913) 집사목사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공주동지방 순회목사로 임명받았다. 이듬해(1914) 연기(燕岐)구역 내의 교회들을 담임하였으며, 1915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연회에 허입되는 한편,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특히 1915년 구미동교회의 사경회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공주지방이 영적으로 큰 성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의 배경에는 스웨어러 감리사를 비롯한 신홍식, 오익표, 김인권, 안창호 목사의 성령체험과 부흥회 인도가 큰 몫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1917년 이북지방으로 이주하여, 평남 평양시 남산현(南山峴)교회 담임목사로 전임되었으며, 이곳에 봉직중 3.1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그는 그 해 2월 14일경 손정도 목사에게 이승훈이 평양 감리교 기홀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를 찾아가게 된다. 이때 이승훈은 신홍식에게 \"나라 잃은 백성이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감동하여 그의 뜻을 따르게 된다. 신홍식은 장로교 길선주(吉善宙) 목사와 함께 그 동안의 독립운동 소식을 접한 다음 의기 투합하기를 결심하였으며 이후 거사를 추진하기 위해 2월 19일 서울로 올라와, 20일에 YMCA 간사인 박희도(朴熙道) 전도사를 찾아갔다. 이때 유창동 박희도 자택에서 이승훈ㆍ정춘수ㆍ오화영ㆍ오기선 등과 밀의하였고 2월 26, 27일 양일간에 걸쳐 개최된 개신교(감-장) 측 비밀회합에서 기독교 대표 16인 중의 1인으로 선정되어 감리교를 대표하여 민족 대표 33인 명단에 서명하였던 것이다(이때에 참석한 일들은 감리교 측에서는 박희도, 신홍식, 오화영, 현순 목사 등이었고, 장로교 측에서는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등이었다). 3월 1일 거사 당일 2시 종로 태화관 선언식에 참가하였다가 현장에서 주동자로 체포당했으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1922년 만기 출옥하였다. 그의 신념은 심문과정에서 말했듯이 \"하늘은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며 \"조선도 하나님 의사로 독립군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홍식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출옥 후의 삶에도 변절이 아닌 끊임없는 민족정신 고취와 독립운동의 노력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홍식 목사는 출옥한 그 해 곧바로 경기도 인천 내리(內里)교회 제9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인천 내리교회의 역사》를 저술하였고, 1927년 강원도 강릉지방 및 원주(原州)지방 감리사를 겸직하였으며, 1929년부터 원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신홍식 목사는 남.북감리교회의 통합에 있어서도 관여하였는데, 조선 감리교회 통합을 위한 연합위원회가 1927년 선출될 때, 미감리회를 대표한 조선인 목사 3인(김찬흥, 송득후, 신홍식) 중 1인으로 선임되어 조선 감리교회의 통합에 노력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각 조선연회에서 선출된 연합위원들을 통해 전권위원회가 성립하고 결국 통합감리교회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감리교회 연합 과정에 신홍식 목사도 동참하고 조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주제일교회를 담임하면서 1933년 4월부터는 급성 풍단병(風丹病)으로 여러 날씩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그 다음해까지도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므로 교회는 말할 수 없는 침체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당시 옆에서 조력하던 모류의 선교사의 주일학교사업과 특히 레어드 선교사의 청년선도사업과 소년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다시 활기를 띨 수 있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해 신홍식 목사는 1935년 연회 보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주구역은 작년 연회에 교제가 명의로만 (재작년부터 병중이었기 때문에 작년부터 부목사를 두려고 했음) 파송을 받고 보조 일인을 청빈하라고 하였으나, 여의히 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오는 중에 심히 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류의씨의 청년지도에 열성을 다한 결과 만흔 청년이 나왔으며 나에시덕씨의 소년지도에 열심한 결과 소년들이 만히 나와서 비록 약한 중이라도 자미 만히 봅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제5회 동부\"중부\"서부연회 회록)

이러한 투병 속에서 신홍식 목사는 결국 1935년 목회일선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도 독립운동 및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다가 수차 검속당하였으며, 은퇴 후에는 원로목사로 원주 및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부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인천 내리교회의 역사》,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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