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신석구(申錫九, 1875. 5. 3~1950. 10. 10)
신석구 목사는 민족과 신앙, 목회와 사회 참여를 조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은 길과 희생적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목회자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앙의 승리자"가 되었다.
신석구는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 구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서당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15세 때 아버지를 잃은 후부터 집을 떠나 방황하였다.
이후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경기도 고랑포에서 친구 김진우의 권유를 받아 민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갔으니 1907년 7월 14일 주일, 그의 나이 33세때의 일이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히 구원할 것이다."
믿은 지 한 달 반 후에 같은 고향 출신인 정춘수를 만나 개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선교사 리드(C.F. Reid, 李德)의 어학선생으로 일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1909년 7월 29일에는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의 죄를 떨쳐버리는 중생을 체험하였다. 1909년 2월부터 전도인이 되어 개성 홍천 가평 춘천에서 목회하였고, 1917년 9월 24일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신앙으로 결단하고 민족의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오화영 목사에게 민족 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바로 결정할 수가 없어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각에 곧 뜻을 결정하였다."
그는 곧 바로 응답하여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재판정에서도 "나는 한일합병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고 조선 독립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아 2년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만기 출옥 후에는 원산 고성 춘천 가평 서울 철원 한포 천안 등지에서 목회했다. 또 옥고를 치르면서 중단했던 학업도 계속하여 1922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한번은 협성신학교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며 학생들에게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신학교 기숙사가 요란하여 그가 들어갔더니 학생들이 장기 두면서 훈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학생들, 성경 보고 기도하시오!" 하고 되돌아서자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또 1934년의 감리교신학교 특별 부흥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참 신앙 노선과 민족을 위한 사명자에 관해 강조하였다.
한편 그는 목회생활에서 비롯된 가난문제로 고민하였다. 1925년 고성으로 파송받으면서 시작된 "물질의 유혹"은 그 후 10년간 그를 괴롭혔다. 그가 이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1937년 천안에서 목회하던 때였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던 중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네게 좋은 집을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던 십자가를 주었다."
이 음성을 들었을 때 너무 감격하여 많이 울었다. 지금까지 당했던 가난의 아픔이 모두 사라졌다. 이후에도 간혹 악마의 유혹이 있었으나 십자가로 물리칠 수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신사가 없는 외딴 곳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와 문애리에서 목회하였다. 1945년 5월에는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여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해방으로 풀려났다.
해방 후에는 교회를 맡아보면서 교회 재건에 힘쓰는 한편 평양의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의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46년부터는 공산 정권과 대립하여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다. 3.1절 기념방송을 하면서 공산당이 작성한 원고 대신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여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생을 당하였다. 또 공산당이 주는 3.1절 공로 표창을 거부하였고, 북조선인민위원회 성립에 대해 냉소적이었을 뿐 아니라 "식량이 결핍함으로 인민의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고 남.북이 대립됨으로 장래에 무삼 불측의 사가 유할가 하야 인심이 동소되는 것은 현저 사실이온즉 이는 깊이 우려"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는 등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공산당의 탄압을 받았다.
그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그를 따르던 교인들은 남한으로의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북한 땅에 남아 있는 어린양들을 이리떼 같은 공산당에게 맡기고 어찌 나의 안일만을 위해 이남으로 가겠느냐?"고 거절하고 북한 땅에 남았다. 그 후 반공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고 공산당이 조작한 "진남포 4.19사건"으로 1949년 4월 19일 우익인사 47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0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함께 잡힌 젊은이들은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6년형을 선고받은 두 여학생을 측은히 여겨 그 두 학생의 형을 합산하여 자신이 22년형을 받을 터이니 그들을 석방하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옥중에서도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키고 위로하였다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하여 그의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의 길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편 신석구 목사는 풍부한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여 많은 한시를 남겼다. 또 일생 동안 무명옷으로 된 한복만을 입는 검소함도 몸소 실천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청렴과 결백으로 목회하였다. 그의 전 생애는 십자가를 잠시도 내려놓지 않고 지고 가는 생애였다. 그는 입으로만 교훈하지 않고 늘 몸으로 실천하였고, 늘 자기의 잘못을 간증하며 눈물로 설교하던 목회자였다.
한국 정부는 그의 반일 독립 투쟁 업적과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하였고, 1968년 9월 14일에는 그의 영현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8년 3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에 건립된 "감신 출신 민족 대표상"에 다른 다섯 분과 함께 그의 흉상이 새겨졌고, 1980년 8월에는 청주시 3.1공원에 충북도민의 성금으로 동상이 건립되었다.
-저서:《자서전》;《빌닙보주석》(역), 동양서원, 1912.
-논문:"신으로 득구하는 도리를 논함", 〈신학세계〉, 1917. 11
-참고문헌:김재황, 《거성 은재 신석구 목사 일대기》, 대구제일교회, 1988;이덕주, 《신석구 연구》,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