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신공숙(申公淑, 1884. 10. 15~1967. 7. 2)


감리사

신공숙 목사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양육되었다. 1894년까지 약 5년간 한학을 수학한 후 12세 때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 18세 때에는 혼자의 힘으로 점포를 낼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19세 때인 1902년 남감리회 매서인으로 개성에 왔던 이화춘(李和春) 전도사의 설교와 권고를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개성남부교회에 출석하면서 개화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의 손에 의해 치리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중 청년교인 몇 명과 교회를 탈퇴, 독립 교회를 세울 결심을 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겨 개성 도강굴에 배의(培義)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그 학교 학생이 되어 수학하였다. 졸업 후 그는 이 학교 교사가 되어 산수와 영어를 가르쳤으니 그는 설립자ㆍ학생ㆍ교사의 3역을 모두 거친 셈이었다. 그는 이 학교 안에 그 동안 바라던 독립 교회로 \"도강굴교회\"를 설립, 선교부와 관계를 맺지 않은 독자적인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비협조적 태도(그는 세례도 선교사의 거부로 1907년 일본인 목사에게서 받아야 했다)와 경험 부족으로 학교와 교회 운영이 어렵게 되어 마침내 도강굴교회를 자진 해산하고 다시 개성 남부교회로 복귀했다.

한편 배의학교는 그대로 유지되다가 후에 중등과를 설치하여 송도중학교의 모체로 발전하였다. 남감리회로 복귀한 그는 북간도로 건너가 자신의 꿈을 실현해 보려 했으나 그의 배일사상 때문에 가던 도중 금천경찰서에 검거되어 북간도행이 좌절되었다. 이때 개성 한영서원을 경영하던 남감리회 선교사 왓슨(A.W. Wasson, 王永德)에게 돌아오라는 서신을 받고 개성으로 돌아와 매서인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1년 동안 매서일을 본 그는 1911년 9월 남감리회 조선매년회로부터 정식전도사로 임명받아 이때부터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 담당한 구역은 장단교회 외 3개 교회였고 1년 후에는 풍덕교회로 옮겼다. 1913년 서울 광희문교회로 옮겼고 이곳에서 3년간 시무한 후 다시 장단교회로 파송받아 1년 남짓 시무한 후 개성북부교회로 전임했다. 이때 협성신학교에 입학, 이듬해 졸업하였으며(제3회), 1915년 10월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첫 부임지는 경기도 이천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간 시무하면서 40여 명의 신도를 4백여 명으로 늘렸으며, 새 교회 건축을 위한 헌금 모금이 독립군자금 모금으로 오인받아 일경에 체포당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신공숙 목사는 1917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고 이듬해 개성북부교회로 전임했다. 1917년경부터 개성을 중심으로 해서는 성서와 전도문서를 나누어주는 특별한 전도운동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부터 개성지방의 부흥회 열기가 뜨거워진다. 그리고 이 부흥회 열기는 1918년에도 이어져 사경회와 연합부흥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신공숙 목사와 에드워즈 양(Miss Edwards) 등이 인도한 집회들은 개성지방 내 교회들의 영적 성숙에 기여하였는데, 이에 대해 웜스 감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해 사업의 현저한 양상 중의 하나는 성서연구에 대한 큰 관심이었다. 부흥회와 함께 진행된 25회의 사경회가 열렸으며, 약 7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사업에서 지방순행 목사인 신공숙은 훌륭한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일의 절반은 특별히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에드워즈 양에 의해서 인도되었다.\"(Minutes of the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18, p.54)

이러한 부흥 속에서 신공숙 목사는, 당시 개성지방 장로사(감리사) 크램의 요청으로 1920년에는 남감리교 선교 100주년 기념강연회 강사로 함경도ㆍ강원도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강연을 실시하였다.

신공숙 목사는 남.북감리교회의 통합에 있어서도 관여하였는데, 1926년 9월에 회집되었던 남감리교회 조선매년회에서, 조선에 있는 남.북감리교회가 통합할 방침을 연구키로 하고 위원을 각각 5명씩 택하였다. 그것이 남.북감리교회 통합의 공식적 출발이 된 것이었다. 이때 신공숙도 그 대표로 참여하게 되는데, 미감리회 조선연회 대표로는 노블, 윌리엄즈, 김찬흥, 김종우, 오기선이 선출되었고, 남감리교회 조선연회 대표로는 저다인, 갬블, 정춘수, 신공숙, 양주삼이 선출되었다. 이 위원들로 구성된 조선남북감리교회 통합방침연구연합위원회는 1927년 각 조선연회에서 선출된 연합위원들을 통해 전권위원회가 성립하고 결국 통합감리교회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의 초석을 다지는 데에 신공숙 목사도 동참하고 조력하였다.

또한 신공숙 목사는 1924년에는 송도중학교 교장 윤치호의 요청으로 송도중학교 교목으로 시무하는 한편, 이듬해에는 개성북지방 감리사로 선임되어 개성지방의 교회를 관장하였다. 이후 1927년 10월 일본 도쿄 한인교회 9대 목사로 부임, 3년간 귀국한 후 수표교교회, 1934년 종교교회에 부임, 12년 동안 봉직하였다.

그는 이 기간 동안 YMCA의 신흥우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시작된 적극신앙단운동에 대해 양주삼ㆍ윤치호와 함께 공개적인 반대자로 나서 투쟁하였는데, 이 문제로 결국 그는 1942년 경기도 의정부교회로 좌천(?)되고 말았다. 의정부교회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은 후 교회 재건의 몸부림 속에서 1945년 11월 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조선기독교 남부대회에서 재판부장을 맞기도 하면서 감리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1946년 6월 13일에는 중앙교회에서 동부연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른 신공숙 목사는 경남 가덕도에 감리교회 교역자 및 교인 수용소 안에 교회를 설립하여 담임하다가 1952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도 김포군 목동교회에서 1959년까지 봉직하였으며 말년에 건강과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다가 1967년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자(첫 부인, 조정혜)와 5남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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