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 5. 29~1922. 3. 23)


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시란돈(施蘭敦)

미국 코네티컷 주 뉴헤븐(New Heaven)에서 아버지 스크랜턴(William T. Scranton)과 어머니 메어리 플레처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 그의 아버지는 뉴헤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어머니는 매사추세츠 주 목사 집안의 딸로서 뿌리깊은 신앙 가문 출신이었다. 16세 되던 1872년에 부친을 여의고, 어려서부터 어머니 쪽에서 신앙적ㆍ사상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878년 예일대학을 졸업했고 뉴욕 의과대학에 진학, 1882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그 해, 룰리 와이드 암즈(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였고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그는 1884년 초 한국 선교 개척의 공로자인 매클레이(R.S. Maclay) 여름 맥클레이 박사로부터 한국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들은 일본 주재 선교사인 해리스 목사로부터 한국 선교를 권유받았지만 일단 거부하였다. 그러나 초여름 지독한 장티푸스 열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선교사로 남은 여생을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884년 12월 4일 뉴욕에서 미감리회 해외선교회 책임총무로 일하던 파울러(C.H. Fowler)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의 연회 소속은 미감리회 뉴욕동부연회(New York East Conference)였으며 그는 의사로서 의료선교를 전담하도록 배려되었다.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그는 1885년 2월 3일 어머니와 아내, 두 살 된 딸, 그리고 아펜젤러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2월 27일 일본에 도착하였다. 당시 한국의 국내 정세로 4월에 인천까지 갔던 아펜젤러 부부가 서울 입성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상황 가운데, 스크랜턴은 가족을 일본에 남게 하고 혼자 내한을 시도하여 1885년 5월 3일 인천에 도착했다. 곧바로 서울로 들어온 그는 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에서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해 6월 20일 일본에 남아 있던 나머지 감리교 선교사들이 내한하고 장로교회에서 의료선교사가 보충됨으로써 스크랜턴이 더 이상 알렌을 도와 제중원 일을 맡아 볼 필요가 없게 되자 6월 24일 제중원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 정동에 새로 마련한 집에 진료소를 차리고 9월 10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886년 6월에는 정동에 독립된 병원 건물을 마련하고 스크랜턴의 한국 이름 \"시란돈\"의 앞글자를 따서 병원 이름을 \"시병원\"(施病院)이라고 했다. 병원 앞에 간판도 내붙였는데, 한쪽에는 한문으로 \"미국인 의사 병원\"이라 써 붙이고, 다른 한쪽은 한글로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에 걸렸든지 매일 열시에 빈 병을 가지고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고 썼다. 그는 1888년까지 3년 동안 6천 8백 67명을 진료하는 초인적인 활약을 보였다. 또한 1890년 서울 시내 두 곳에 새로운 선교를 시도하였는데, 10월경 남대문에 새 진료소를 차린 것과 종로에서 집회를 시작한 일이었다. 1889년 8월에 내한한 맥길(W.B. McGill)이 주로 맡아보았던 남대문진료소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1년 3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2년 5월에 귀환한 스크랜턴은, 그때까지 미감리회 조선 선교 주관자(superintendent)로 일하던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했기 때문에 돌아오는 즉시 주관자로 임명되었다. 1년 6개월 만에 귀환한 스크랜턴은 병원에서 진료하고 수술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예배실을 마련하여 직원ㆍ환자가 매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짧은 기간 안에 10명의 학습인이 생겨났다. 이 외에도 스크랜턴은 의주ㆍ평양ㆍ원산ㆍ대구ㆍ전주ㆍ공주 등지에 산재해 있는 감리교 선교사업을 총괄하면서 교회 일뿐 아니라 정동의 시병원ㆍ상동과 아오개의 진료소ㆍ정동의 보구여관 등의 일을 돌보았고, 배재ㆍ이화학당의 교육까지 감독했다. 또한 올링거(F. Ohlinger)가 주관하는 미이미교회 인쇄소 일과 존스가 시작한 신학회(Theological Class)에도 나가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해 강의하기도 했다. 스크랜턴은 이미 1890년부터 성서 한글 번역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안식년 휴가를 다녀온 후에도 성서 번역에 참여하여 로마서ㆍ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했으며 예배용으로 구약의 창세기ㆍ출애굽기ㆍ시편 등을 번역하였다. 이와 함께 감리교 교리서와 전도 문서 번역도 착수하여 이미 1889년 사도신경ㆍ십계명ㆍ주기도문 등을 번역하였고 계속해서 감리교 교리와 장정에 관한 문서들을 번역 출판하였다.

1차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 전 남대문진료소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있던 스크랜턴은 귀환 후 외국인 거주지역인 정동과 달리 \"민중이 있는 곳\"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길 것을 선교회에 강력히 건의했고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1894년 병원을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겼다. 이미 맥길의 의료사업과 노병일의 전도로 20여 명의 교인이 생겨나 상동지역 전도의 밑거름이 마련되었고,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상동으로 거처를 옮겨 여인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상동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앞서 설립된 정동ㆍ아오개ㆍ동대문ㆍ종로교회보다 더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교인이 늘어 시병원 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에 비좁자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있던 달성이궁(達城離宮)에 널찍한 한옥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무렵 훗날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될 인물들이 스크랜턴에게 감화를 받아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엡윗청년회, 청년학원, 공옥학교 등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민족운동가들과 폭넓은 교제를 가졌던 숯장사 출신의 전덕기, 을미의병 의병장 구연영,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참여한 이필주, 한국 감리교회의 2대 총리사가 될 김종우 등이 바로 그들이다.

1898년 11월, 2차 안식년 휴가를 보내고 1900년 2월 귀환한 스크랜턴은 상동교회의 새 예배당을 마련하는 일에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했다.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의 도움과 상동교회 교인들의 헌금으로 1901년 5월 미드 메모리얼회당(Mead Memorial Chaple) 건축이 완료되었다. 스크랜턴은 상동교회 새 예배당을 건축하는 힘든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선교 주관자로 서울ㆍ평양ㆍ원산ㆍ공주ㆍ수원 등지의 교회들을 순방하며 지도해야 했다. 또한 1901년 5월에 상동교회에서 열린 제17회 한국 감리교 선교매년회에서 지방을 셋으로 나누고(남방ㆍ북방ㆍ서방지방) 각 지방에 장로사(長老師)를 두었는데 스크랜턴은 남방지방회 장로사로 임명되었다.

감리교 남방지방회 장로사, 선교 주관자로 바쁜 일정을 보내던 스크랜턴은 1901년 7월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갑자기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1904년 10월에야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해 귀환할 수 있었는데, 그는 돌아오자마자 경기도지방회 장로사로 취임하였고 선교 주관자 자리도 다시 얻게 되었다. 장로사로서 그는 서울을 비롯하여 이천ㆍ광주ㆍ수원ㆍ여주지역을 맡아 교인들을 돌보았고, 선교 주관자로서 평안도지방회ㆍ황해도지방회ㆍ경기서부 및 충청도지방회 그리고 여선교회 사업까지 총감독해야 했다.

1907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감리교 선교연회에서 스크랜턴은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연회는 그를 본처 사역자(local preacher)로 직함을 바꾸었다. 그의 돌발적인 사임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당시 감독으로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 선교사로 기록된 해리스(M.C. Harris) 감독과 그의 편을 들어주는 선교부와의 불편한 관계가 결국 스크랜턴으로 하여금 선교사직을 그만두도록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 스크랜턴은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자기 집을 사무실로 삼아 의료선교사회(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 of Korea)를 조직ㆍ육성하였으며, 피로에 지친 선교사들이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서 \"서울 요양원\"(Seoul Sanitarium)을 1910년 6월 이전에 완공하였다. 또한 1907년 감리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10년 10월 이전에 성공회에 사제가 아닌 평신도 신분으로 이적했다. 이후 스크랜턴은 1911년 1월 평북 운산에 있는 미국인 소유 금광으로 가서 광산 소속 의사로 진료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1916년경에 충남 직산에 있는 금광 부속병원으로 가서 활약하였고, 1917년에는 중국 대련으로 가서 의사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에서 개인병원을 차리고 말년을 보내다가 1922년 3월, 그곳에서 쓸쓸히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고베 카스가노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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