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 12. 9~1909. 10. 8)
미국 메사추세츠 주 벨처타운에서 출생. 결혼하기 전의 이름은 메리 벤(Mary Benton)으로 벤튼 가문은 뉴잉글랜드의 전통 있는 감리교 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E. Benton)와 남동생, 조카도 미감리회 뉴잉글랜드연회의 목사였다.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스크랜턴은 1855년 코네티컷 주 뉴헤븐의 제조업자인 윌리엄 스크랜턴(W.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1856년 5월 29일 외아들인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W.B. Scranton)을 낳았다. 1872년 그의 나이 40세에 남편과 사별하였고, 그 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연회 서기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생활하던 중 한국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1884년 10월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첫 여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내외와 두 살 된 손녀, 아펜젤러 가족 일행과 함께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한국의 국내 사정으로 인해 잠시 일본에 머문 후 6월 20일 내한하였다.
내한하여 봉건제도에 얽매여 있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이 시급함을 절감하고 한국 여성의 전통적 미덕과 품성 위에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시키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5년 10월 정동에 따로 부지를 마련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학교를 준비하였다. 1886년 2월부터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5월경부터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김씨 부인\"으로 알려진 정부 관리의 첩에게 가르쳤으나 석 달이 못되어 떠나갔다. 한달 늦게 \"별단이\"라는 학생이 찾아왔으니 그가 실질적으로 첫 학생이다. 그 해 11월에 완공한 한옥 교사(校舍)는 여선교사들의 거주처이자 한국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구심점이 되었다. 1887년 명성 황후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외서독판 김윤식을 통하여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명칭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7년 9월 14일 한국을 방문중인 워른(H.W. Warren) 감독의 주재 아래 열린 제3차 연례 선교회의에서 이화학당장으로 임명\"파송되었다. 이화학당을 통한 그의 교육사업은 불평등과 삶의 억압 속에 살던 여성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통하여 자기 개발과 인간해방을 맛보게 하며, 불운한 여성\"비천한 계층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소외를 사회 참여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승화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으로 볼 때 남성들과 여성들이 함께 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8년 1월에 성경공부 형태로 추진되는 여성들만의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조직하였다. 19명의 여성으로 시작된 주일학교는 여성들만의 주일예배로 발전되었으며 1889년 2월 12일 한국 최초로 여성 교회(Woman\'s Church)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891년 이화학당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학당장 직책을 로드와일러(L.C. Rothweiler)에게 물려주고 3월 18일 1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2년 5월 다시 서울로 돌아온 스크랜턴 대부인은 1891년 1월 4일부터 시작된 동대문 선교사업에 합류해 미감리회 여선교사들과 함께 여성들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아들 스크랜턴이 1894년 선교지역을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기고 선교활동을 벌여 나갔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자 거처를 상동으로 옮겨 직접 여인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상동지역의 여성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상동지역의 여성들에게 복음 전도활동을 전개하는 것 이외에 후에 공옥여학교로 불리게 될 달성궁매일학교(Day School)를 설립하여 여자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1890년대부터 상동교회 내에서 전도부인(Bible Woman)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1900년 어간에는 부인성경학원의 모습으로, 1920년에는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898년 11월, 2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유럽으로 떠났던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0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1901년 7월 말에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노령에 든 병이라 빠르게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04년 10월에야 건강을 회복해 다시 귀환할 수 있었다.
교육사업과 함께 스크랜턴 대부인은 1893년 여성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지방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통해 문맹의 여성들은 가르침을 받았고 복음을 통하여 생활이 변화하였다. 1900년 수원ㆍ공주구역에는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만한 인력과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여성선교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는 여성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장지내 외에 지금의 경기도 일대 지역을 방문하였으며 1896년에는 시흥, 고천, 고양, 동막, 용시, 양천 등지에서 선교하였다. 또한 1901년부터 교육이 시작된 무지내여학교에 조신성 선생을 보내 교육하게 하였고, 1897년에 교회가 설립된 덕고개의 여자매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1902년 수원에서 시작된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선교 지원금을 선교부에 요청하고 교사를 발탁해 교육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06년 엄비에 의해 설립된 진명여학교에서 일주일에 이틀 아침 시간을 할애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07년에는 상동교회 내에 있는 공옥여학교와 무지내여학교, 그리고 덕고개에 있는 여학교 외에 수원에 있는 여학교까지 포함해서 네 곳의 매일학교를 감독하고 있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도움을 베푸는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 감리교회 선교사로 내한한 지 25년째 되던 해인 1909년 10월 8일 새벽, 향년 77세의 나이로 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여성 교육의 개척자로,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자신의 후반 생애를 바쳐 일구어낸 땅, 한국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