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쇼(William E. Shaw, 1890. 8. 22~1967. 10. 5)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남.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에는 미국 육군 군목으로 위임되어 유럽전선에 종군하였다. 1921년 콜롬비아대학원을 졸업하여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921년 10월부터 1926년까지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현 광성고교)에서 활동하였다.
미감리회 제17회 연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1924년 9월에 모일 때 9월 19일 누가복음 9장 57절을 본문으로 \"천국에 합당한 일꾼이 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여 연회원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9월 24일 주일에는 장로목사 안수를 워렌 감독에게 받았다. 광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선교부 회계사무도 맡아 수고하였다. 1926년 6월 연회가 끝난 뒤 7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보스턴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27년 방한하여 다시 연회에서 평북 영변지방 감리사로 임명받아 영변, 만주, 해주지방 등지에서 지방전도사업을 위해 수고하였으며 부인은 숭덕여학교에서 교육에 헌신하였다.
1929년 6월 연회의 영변지방 감리사의 보고에 의하면 1928년 10월부터 1929년 5월까지 순행일자 1백 54일 동안 영변, 만주, 해주지방까지 사경회, 전도집회 등 지방순행 2회, 전도는 70회, 사경회 시간이 50시간에 달하였다 한다. 1932년 3월부터 해주지방 감리사로 지방교회 행정을 맡아 수고하면서 신창지방 지방목사의 전도사업도 아울러 감당하다 1934년 5월에 귀국했다가 1935년 4월에 다시 와서 해주지방 전도사업에 힘을 썼다. 1938년 봄부터 동료 선교사인 무어(문요한)와 함께 평양 요한학교를 창설하여 관서지역의 교역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41년 미국 선교부에서 일본, 한국 등 지역의 선교사들의 귀환 명령을 내렸으나 선교회 재산 처리 등 잔무를 처리하고 가장 늦게 철수하였다.
귀국한 쇼 목사는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에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신학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부터 필리핀에 파송되어 1947년까지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 해 내한하였다. 1950년에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교역자들의 피난을 도왔으며 육군 군목으로 종군한 경험이 있어서 주한 미군에 자원하여 군목으로 활동하였다. 미국 극동사령부 군종사령부 베넷(Ivan L. Bennett) 군목과 각 사단 군종참모들과 협의 끝에 한국군의 군종제도 창설을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가톨릭 메리놀선교회의 캐롤 신부와 함께 한국 육군에 군목제도를 창립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교섭하고, 미국의 군목들과 연락을 하여 1950년 12월 21일 국방신 29호와 1951년 2월 7일 육본일반명령 31호로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뒤에 군목병과)를 설치함으로 제도화하였다.
1954년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나와 감리교 대전신학교(현 목원대)로 파송받아 교수하는 한편, 대전신학교 구내에 목자관을 설립하기 시작하여 1955년 7월에 준공하였다. 목자관은 전국의 교역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수양관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그의 외아들 윌리엄 해밀톤 쇼(1922~1950)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의 박사학위과정을 공부하던 중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참전했다. 미국 해군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서울을 탈환한 후 서울 근교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에서 전사하여 그곳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목원대학교에 기념예배당이 건립되었다. 그는 아들을 잃고도 대전신학교에서 교수로 헌신하다가 1961년 은퇴, 귀국하여 여생을 보냈고, 1967년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대로 유해는 부인이 서울로 안고 와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아들 옆에 나란히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