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송흥국(宋興國, 1902~?)


연회장

송흥국 목사는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협성신학교(1924), 연희전문학교 문과(1928)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퍼시픽신학교(1933)를 졸업한 웨슬리신학 전공의 \"학자\" 목사였다. 그는 1939년 5월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평양 남산현교회 부담임(1924), 이화여전 강사(1930), 평북 회천교회(1936) 전도사로 시무했다. 그 후 총리원 교육국 간사(1939), 삼청동교회(1941)를 시무하기도 했다.

송흥국 목사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는 감리교회가 일제의 억압 속에서 변질되고 암울해져 가던 상황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가 삼청동교회로 부임했을 당시는 목사 없이 일제에 의해 계속적으로 탄압받던 시대였다. 교회는 당국의 지시에 그대로 순응하며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국기배례를 비롯한 일본식 의식을 실시하였고 시국 관련 모임도 종종 열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1년 3월에 열린 중부연회에서 송흥국 목사가 삼청교회에 파송된 것이었다.

송흥국 목사가 삼청교회로 파송된 1941년 3월 연회는 사실 한국 감리교회 전통이 막을 내리는 \"장례식\"과도 같은 회의였다. 이 모임에서 감리교 전통인 연회(年會)를 해산하고 일본식으로 교구(敎區)를 조직하였는데, 연회뿐 아니라 총회 명칭도 \"기독교조선감리회\"를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라고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감리교회 법인 〈교리와 장정〉도 폐지하고 〈교단 규칙〉을 새로 만들어 공포하였는데, 이에 따라 총리원을 \"교단본부\"(敎團本部), 감독을 \"통리자\"(統理者), 목사를 \"교사\"(敎師), 권사를 \"권도사\"(勸道師)로 바꿔 불렀고 입교인, 세례아동, 원입인 같은 교인 명칭도 \"정회원\"(正會員), \"연소회원\"(年少會員), \"객원\"(客員), \"구도회원\"(求道會員)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교회 임원을 \"역원\"(役員)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를 \"일요학교\"(日曜學校), 여선교회를 \"부인회\"(婦人會), 엡윗청년회를 \"공려회\"(共勵會)로 \"혁신\"하면서 이 단체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민족주의 색채를 완전 제거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이런 식으로 \"창씨개명\" 당하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은 정춘수 감독을 중심한 혁신교단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1938년 10월 제3회 총회에서 양주삼 목사의 뒤를 이어 2대 총리사(총회 후에 감독으로 바꿈)로 선출되었던 김종우 목사가 1년도 못되어 1939년 9월 돌연 병으로 별세하자 총리원 이사회는 정춘수 목사를 후임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정춘수 목사는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한 적이 있고, 1920년대까지만 해도 민족운동에 참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상전향서를 쓰고 석방된 이후부터 노골적인 친일파 인사가 되었다. 그는 1939년 감독이 되자마자 총독부의 황민화정책에 적극 순응하여 한ㆍ일 감리교회 합동을 추진하였고 \"교단 혁신안\"을 발표, 한국 감리교회 전통과 양식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그가 이끄는 총리원 조직을 \"혁신교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총독부의 지시에 절대 순응하는 친일교단을 의미하였다.

이 같은 혁신교단의 노골적인 친일행각에 불만을 품은 교인들이 적지 않았다. 혁신교단은 이들 반대세력에 회유와 협박을 가했는데 그럼에도 반(反) 혁신교단 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파면\"(罷免), \"퇴직\"(退職), \"면직\"(免職), \"휴직\"(休職), \"대명\"(待命) 등의 명분을 내세워 교회 밖으로 추방하였다. 따라서 총독부와 경찰 당국의 지휘를 받고 있던 혁신교단에 반대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파면과 투옥의 위험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송흥국 목사는 류형기, 정일형, 구성서, 전효배, 마경일, 이규갑, 김광우, 김종만, 이윤영, 노진박 목사 등과 함께 반(反) 혁신교단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이미 1941년 3월 연회부터 정춘수 감독 반대운동을 펼쳤는데 혁신교단의 견제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혁신교단 본부는 1942년 3월 대대적인 목회자 이동을 실시하면서 혁신교단 반대인사들을 정리하였는데 이때 송흥국 목사도 그 \"대명\"(待命)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대명\"은 말 그대로 \"다음 임명을 기다리라\"는 뜻이지만 \"대명\" 처분은 혁신교단 반대자들을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악용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송흥국 목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 혁신교단 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를 비롯한 반 혁신교단 인사들은 1943년 10월 총회에서 정춘수 감독 체제를 붕괴시키고 다시 양주삼 목사를 감독으로 세워 난국을 타개해 나가기로 하였다. 양주삼 총리사 시절 총리원 교육국 총무였다가 정춘수 체제가 들어선 후 해주읍교회로 파송되었으나 이를 불복하고 반 혁신교단 모임의 대표자로 활동했던 류형기 목사의 증언이다.

\"1942년 총회가 가까워 오자 일인의의 악희의 대상이 된 교회를 구하기 위해 가장 적임자는 전 총리사 양주삼 박사라는 여론이 돌아 양총리사 선거 운동 위원들이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는 나를 불러냈다. 나와 정일형 박사는 평안도, 구성서ㆍ송흥국 두 목사는 황해도, 전효배 목사는 경기도를 순회하며 양총리사 재선 유세할 것을 지명 받았다. 9월 중순 정 박사와 같이 평양, 진남포를 지난 영변에 이르니 평양 형사들이 우리를 잡으러 뒤따랐다. 그래 뒷문으로 빠져 만포선, 경원선을 타고 서울에 돌아오니, 다음 날 아침 일찍이 평양형사 둘이 집에 들어섰다.\"(류형기, 《은총의 85년 회상기》, 한국기독교문화원, 1983, 130쪽)

류형기 목사를 비롯하여 정춘수 감독 반대, 양주삼 감독 추대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예외 없이 체포되었다. 삼청교회에 부임하기 직전 교육국 간사로 류형기 목사의 지휘를 받았던 송흥국 목사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체포를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구성서 목사와 함께 자기 고향인 황해도지방을 돌면서 반 혁신교단 선전을 하다가 역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의 옥중생활을 송흥국 목사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감옥생활을 했는데, 나뿐 아니라 교역자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 같이 여길 만큼 일본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심했다.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단을 만들기 위해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으례히 감옥이라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3.1운동 때에는 평양감옥에서 조만식 선생과 또 한글학자인 이윤재 선생과도 함께 있었는데 얼마 안 되는 감방에 20여명이 있어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가두었다. 이와 같이 악독한 탄압을 했지만, 감방에서도 우리의 민족을 향한 마음은 억압하지 못하였다.\"(\"감옥은 초만원,\" 〈기독교세계〉, 434호, 1965. 8. 14)

송흥국 목사는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43년 3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9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3개월 더 옥고를 치르고 1943년 6월 석방되었다.

그 후 송흥국 목사는 해군본부 정훈감(1950),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총무(1952)로 재직하였는데, 기독교교육협회 총무 재직 시절 종전 후 기독교교육사업의 비전과 사업들을 제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펴 나갔다. 그는 그의 취임사에서 기존의 주일학교교육에 치중한 기독교교육의 틀을 확장시켜 가정, 교회, 학교, 사회로까지 그 범위를 넓히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공과교재의 확충과 범 교단적 기독교교육사업 및 사회기관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의 구비를 강조하고 있다(〈감리회보〉, 1953. 2. 1).

또한 그는 해방 후 감리교회의 극심한 분열과정 속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감리교회의 통합운동을 전개했던 감리교 통일전권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 후로도 정릉교회(1959)의 담임목사를 거쳐, 감리교신학대학 전임 강사 겸 사감(1965)으로 봉직했다. 또한 한국기독교 근로전도회 회장(1964), 동부연회장(1970) 등을 역임했으며, 1972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용두동교회 소속목사로 지냈다.

-저서:《요한웨슬레》, 대한기독교서회, 1961;《기독교입문》, 대한기독교서회, 1955;《오늘의 세계종교》, 감리회총리원 교육국, 1971;《웨슬리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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