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송정근(宋貞根, 1895. 1. 12~1950 ?)
송정근 목사는 황해도 서흥군 도면 도리 조용한 시골에서 송경호(宋敬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학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엄격한 유교적 교훈을 받고 자랐으며 7세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동리에서 10리 떨어진 양몽학교(養夢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1913년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무렵 기독교인이 되었다. 숭실에서 배우는 동안 특히 베어드 교장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아 복음전도자로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1917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제13회) 1920년 첫 전도사업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처음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1학년 과정을 수료하였으나 이후 감리교회로 옮겨 1923년 미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고 1924년 서울의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에 편입, 1927년 졸업하였다.
전도사로 개성지방 토산(兎山)구역에서 시무하였고 1927년 신학교 졸업(제14회)과 함께 미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양양(讓陽, 1926~1929), 고저(庫底, 1929~1932), 고성(高城, 1932~1935), 비석리(碑石里, 1935~1937), 강서읍(江西邑, 1937~1943)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목회 일선에서도 불의와 부정 앞에선 당당히 맞섰는데, 양양교회 재직 시에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을 반박하다가 고난을 겪었고, 고저교회에서는 부정결혼이 있어 이를 책망하다가 어려움을 겪었으며, 고성교회 재직 시에는 소위 무교회주의자인 최태용 일파의 난동으로 많은 고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이러한 정신은 일제 말 친일 교권주의자들과도 맞서는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
송 목사는 특히 강서읍교회에서 시무하는 7년 동안 강서지방 감리사를 역임하면서 강서지방 교회 발전에 뚜렷한 공적을 남겼으며 도산 안창호와 함께 2대 강서 인물에 꼽힐 정도로 주민들에게 추앙받았다. 1930년 9월에 모인 남감리회 매년회에서는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이사로 피선되었고 원산 성경학원 강사로 초빙되어 교단에도 서야 했다. 1935년부터는 예수교서회 이사로서 출판사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 평양 기림리(箕林里)교회로 옮겨 시무하였으나 일제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황해도 산골에 묻혀 은거생활을 하던 중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그는 배덕영(裵德榮) 목사의 주선으로 이북 제1의 감리교회인 평양 남산현(南山峴)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성실한 목회생활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감이 그를 북한 감리교회의 지도자로 부상시킨 것이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서부연회를 재건하여 날로 심해 가는 공산당 세력에 대항할 힘을 키우려는 의도로 신석구, 배덕영, 이진구, 이피득, 조윤승 등과 함께 남산현교회에서 서부연회를 재조직하고 그 회장(감리사 겸임)에 선출되었다(평양 중앙교회에서 소집된 해방 후 제1회 서부연회는 평양 남산현교회의 송정근 목사를 연회장으로, 원산중앙교회의 이진구 목사를 부회장으로, 평양 박구리교회의 이피득 목사를 서기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1941년 10월 정춘수 감독에 의해 연회가 해산당한 지 정확히 5년 만에 서부연회가 재건된 것이다. 서부연회는 1949년 7월까지 네 차례 소집되고 폐지되었으며, 그 후로는 초교파적인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된다.
송정근 목사는 불타 없어진 남산현교회당을 4년 만에 옛 모습대로 복원시키고 서부연회장으로 북한지역 감리교회를 관장하며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도 전개해 나갔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는 공산정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연합으로 장대현교회에서 모이는 데 전력을 다했고, 주일선거에는 직접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했으며, 한편으로는 장로교 측 이북5도 연합노회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 공산당에 대항할 기독교 민주진영 세력을 확보하는 데 헌신하였다. 그 노력은 결국 1947년 5월 미소공동회담을 계기로 \"기독교민주당\"을 결성하는 것으로 총집결되기에 이른다.
감-장 양 교파 교계지도자들이 망라된 이 정당의 산파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부당수로 당선되어(당수는 장로교의 김화식(金化湜) 목사) 탁월한 지도력과 인격으로 수많은 난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진영의 움직임을 공산당이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1947년 6월 15일경부터 북한 정권은 기독교자유당의 창당발기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당수인 김화식 목사를 비롯해 장로교 연합노회장 김진수 목사, 감리교 서부연회장 송정근 목사, 서부연회 서기 이피득 목사와 김길수, 김현석, 이학봉, 허천기, 기형순, 강문구, 조연창, 윤창덕 등을 반동이란 명분으로 체포하였다. 곧 이들에겐 지독한 고문이 가해졌고 특히 기독교민주당 조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송정근 목사는 비인도적인 고문을 받아 빈사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감리교와 장로교의 최고지도자들이 망라되어 추진된 기독교자유당 결성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그 해 6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서부연회는 송정근 연회장과 서기(이피득)가 구속된 관계로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연회 간부들은 송정근 목사를 구출하는 방안으로 대신 인질로 구속될 방법을 구상하여 그 인질로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신석구(申錫九) 목사와 현병찬(玄炳讚) 목사가 자원하여 결국 이들이 인질이 되어 송정근 목사는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극도로 악화된 건강상태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남산현교회와 성화신학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성화신학교 부교장이었던 그는 \"드문 인격자이면서 명설교가였고 유명한 성경연구가\"(홍현설 목사)로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신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기독교도연맹 측이 장로교 평양신학교를 수중에 넣을 무렵,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는 당사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통합시키는 계획을 강압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학교 명칭은 평양기독교신학교로 하고, 교장은 장로교 측의 이성휘 목사, 교감은 감리교 측의 송정근 목사가 맡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학생 수는 두 신학교 재학생 1천 2백 명 가운데서 선발된 1백 20명으로 축소하며, 1950년 3월부터 통합된 신학교 체제로 개교한다는 것이었다.
통합된 기독교신학교는 기독교도연맹의 직접적인 주관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50년 초에 이르러서 기독교도연맹은 감리교와 장로교 양 교단을 모든 영역에서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이때와 시기를 같이하여 공산당은 송정근 목사를 그냥 두지 않았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6월 24일 저녁, 공산당은 송정근 목사의 집을 전격 기습하여 그를 연행해 갔다. 연행되는 순간 잠깐 동안 기도를 한 뒤 가족들에게 \"나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몸이니 아무 염려 말고,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공산군이 그를 살해하고 도주하였다는 말이 전해질 따름이다. 유족들은 모두 월남하였는데 부인 안정신(安貞信)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고 있다. 장남 창화(의학박사), 2남 계화(상업), 3남 태화(군목), 장녀 세화(김부진 장로 아내), 2녀 인화(이시준 목사 아내), 3녀 영화.
-참고문헌:《殉敎者 宋貞根牧師傳》,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