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송득후(宋得, 1890~?)


목사

송득후 목사는 평북 회천에서 아버지 송희봉 목사에게서 출생하였다. 1915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정회원 목사가 되었다. 평남 칠산교회(1916), 황해도 서흥교회(1917), 평양 박구리교회(1919), 삼화교회(1921), 경기 수원종로교회(1922), 강원 원주제일교회(1928), 충남 강경교회(1929), 홍성교회(1933), 삼화교회(1934)에서 시무했으며, 1937년 만주로 건너가 1947년까지 북만주지방에서 목회하였다.

1930년 한국 남.북감리교회가 합동, 기독교조선감리회로 단일 자치교단이 이뤄지자 1920년부터 남감리회에서 시작된 북만주와 시베리아지역의 선교사업과 1910년 미감리회에서 개척한 동만주지역 선교사업도 자연히 합동되어 만주선교연회로 발족하게 되었다.

1930년 만주선교연회로 조직할 당시부터 교역자 양성기관까지 설립코자 했으나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현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만주 선교사업에 뜻을 품고 있던 채핀 선교사가 1936년에 만주 선교사로 임명되자 그는 한국 협성여자신학교의 설립\"경영\"교수의 경험을 살려 1937년 4월 16일 캐나다교회 교회당을 빌려 만주신학교를 설립, 개교했다.

송득후 목사가 만주지역으로 왔을 당시는 정춘수 감독이 감리교의 최고 행정지도자가 된 직후라 일제는 선교사들을 교회 요직에서 제거하라는 압력을 가해 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제는 기독교계 교육기관의 책임자 자리에서 선교사들을 제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채핀 선교사가 설립한 감리교 만주신학교는 1938년 1월에 채핀 교장이 사임하고 이사장 배형식 목사와 교장 송득후 목사가 취임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감리교 만주신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목회활동을 이루었다.

송득후 목사가 만주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만몽(滿蒙) 선교사였던 이현태의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충청도 출생으로 함경도에서 성장한 후 동아기독교회(東亞基督敎會)에서 성경을 배운 이현태는 부인 이충신(李忠臣)과 함께 몽고지역 선교사로 자원해 갔다. 그 후 그들 부부 선교사는 러시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러시아교회와 관련을 맺었다가 공산정권에 의해 기독교회가 모두 해체됨에 따라 무소속 독립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1917년 내몽고로 들어가 한국인 방용범(方龍範), 중국인 이달고탁(李達古鐸) 등과 함께 왕무묘(王武廟) 지역에서 한국인과 몽고인을 상대로 전도사업에 힘쓰고 있었다. 몽고 전도사업에 한국 교회의 후원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현태는 1935년 전주에서 모이는 장로회 총회를 방문하였으나 이현태는 장로파 선교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거절당하였다.

1939년 이현태 목사의 순교 소식이 들려 왔다. 당시 몽고 선교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온 송득후 감리교 만주신학교 교장은 그 보고문에서, 이현태 목사는 오지에 들어가 야외에서 집회를 인도하다 괴한 철장(鐵杖)에 옆구리를 찔려 숨졌으며, 아내에게 \"만일 당신이 나의 참 아내라면 임지를 떠나지 말고 선교사업을 확장하기까지 정성을 다하여 사업을 붙들고 나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감리교 만주신학교에서는 즉시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만몽선교회(滿蒙宣敎會)를 조직한 후 중국인 전도인을 파송하여 몽고 선교를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즉석에서 선교비를 헌금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감리교신학교에서도 몽고 선교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만주에서의 송득후 목사를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이후 송득후 목사는 귀국하여 논산교회(1947), 대전제일교회(1951), 전주제일교회(1955)에서 시무한 후 1961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919년 평양 3.1운동에 관련되어 1년 6개월형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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