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손정도(孫貞道, 1882. 7. 2~1931. 2. 19)


독립운동가. 자는 호건(浩乾). 호는 해석(海石)

손정도는 1882년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전통적 유학자인 손몽룡(孫夢龍)과 오신도(吳信道)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특히 그의 모친 오신도는 1919년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13세 때, 박신일(朴信一, 1879~1967)과 결혼하고 20세 되기까지는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는 평범한 생활로 지냈다. 1902년 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조(趙)씨 성을 가진 마을에서 하루를 유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집이 목사의 집이었다. 그는 그 목사를 통해 신학문과 기독교 진리에 대해 설명을 듣게 되었고 원래 성격이 활달하고 열정적이었던 그는 그 밤에 \"몸이 떨리는\" 감동을 체험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튿날 아침 그 목사는 손정도의 상투를 잘랐고 손정도는 평양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단발령으로 의병까지 일어났던 당시 풍토에서 갑자기 상투를 자르고 나타난 손정도의 행동은 분명 하나의 혁명이었다. 게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집에 있던 사당을 때려 부수자 집안에서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내쫓았다. 그는 눈 덮인 산에서 밤새 기도하다가 실신하여 주민들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전날 만났던 평양교회의 목사를 찾아갔고 그 목사는 그를 평양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무어(J.Z. Moore, 문요한) 목사에게 보냈다. 무어 목사는 그를 자신의 비서 겸 어학선생으로 삼고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했다. 1904년에 입학하여 1908년에 졸업하였는데(제5회), 1907년 평양지방을 휩쓴 대부흥운동에 자극받아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1909년 미감리회 조선매년회는 그에게 정식으로 전도자 직첩을 주어 전도사업에 전념케 하였다.

첫 목회지는 진남포였다. 남달리 의분이 강했던 그는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외치면서 설교 때마다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규탄하였고 그의 열심 있는 전도로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다. 이 같은 목회 실력을 인정받아 1911년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고 목사 안수를 받는 즉시 만주지방 선교사로 선택되어 모교인 숭실학교 지원을 받아 만주지방에 파송되었다. 먼저 북경에 머물면서 중국어를 배웠는데 이때 조성환(曺成煥), 백영엽(白永燁) 등 민족운동가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것이 후에 그가 가츠라(1849~1913) 공작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수난을 겪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어에 어느 정도 자신을 얻게 된 그는 목적대로 하얼빈에 본거지를 두고 만주 땅에 이주해 온 한국인 실향민뿐 아니라 만주 중국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실의에 빠진 한국 이주민들에게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을 심어주어 민족운동가로서의 역량을 널리 발휘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노력과 성과들을 우려한 일제에 의해, 만주 교포사회에 점점 영향력을 넓혀 가는 기독교 세력을 제거할 목적에서 1912년 소위 가츠라암살음모사건이 조작된다. 이때 일제는 조성환, 백영엽, 손정도 등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악형을 가했다. 1년 만에 일단 무혐의로 석방된 그는 다시 북간도 무관학교 설립기금 모금사건으로 체포되어 결국 1년간 전남 진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인 진도에서도 복음전파와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고 1년 후 서울로 돌아올 때엔 섬 주민들이 뱃길을 막으며 이별을 아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감리교회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로 돌아온 그는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었고 1년 후인 1915년 감리교회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로 다시 파송되어 시무하였다.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3년간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정동제일교회 부임 이후 \"열렬한 영적 능력의 설교와 전도적 품격은 전국을 통하여 상동의 전덕기 목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훌륭한 성직자\"(장석영 목사)로 교인 수를 2천 2백 83명으로 올려놓아 당시 전국에서 으뜸을 차지하는 교회로 발전시켰다. 또한 교회 증축 공사도 무사히 마무리하고 남녀구분 예배도 폐지하며, 교회 안에 의자를 놓아 장안의 화제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처럼 열성적인 목회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918년 겨울 그는 갑자기 정동교회를 사임하였다. \"신병을 치료할 겸 몸을 쉬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사임 이유였으나 실상은 의친왕 이강(李堈) 공과 하란사(河蘭史)를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하여 상해로 가서 공작하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는 우선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옮겼고 상주(喪主)로 변장한 채 열차 편으로 안동을 거쳐서 상해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한 채 상해에서 3.1운동을 맞았다.

3.1운동 이후 그의 민족운동 활약상은 눈부신 것이었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의정원이 결성될 때 초대 부의장에 선출되었고(의장은 이동녕) 그 해 4월 30일부터 5월 13일까지 개최된 의정원 회의에서는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9월 6일 병중에도 의정원 회의를 주재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계속 상해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1920년 1월에는 김구, 김철, 김립, 윤현지, 김순애 등과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였고, 그 해 백영엽, 차이석, 주요한 등과 함께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22년 2월 23일에는 대한적십자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그 해 10월 28일에는 독립전쟁 비용조달 및 군인양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여 노공부장(勞工部長) 직을 맡았다. 또한 이 기간 중에 북경에서 개최된 감리교 동아선교대회에 백영엽과 함께 참석하여 국내에서 온 현순(玄楯), 신흥우(申興雨) 등 대표들과 회동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의 진상》(한\"영판)을 회의에 참석한 외국 선교사들에게 나누어주며 우리의 독립운동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 내 계열간의 불화로 독립운동이 답보상태에 이르자 그는 1921년 근거지를 만주 길림으로 옮겨 길림 한인교회를 담임하는 한편 만주 각지에 산재해 있는 무장독립단체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무장 독립운동가 현익철(玄益哲), 오동진(吳東振), 김동삼(金東三) 등과 끊을 수 없는 의형제 관계를 맺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길림으로 이주한 후 그가 세운 첫 공적은 안창호 구출작전이었다. 1927년 2월 상해를 떠나 북경을 거쳐 만주 일대를 순회하며 민족단결과 경제발전을 요청하는 강연회를 개최하던 안창호 일행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장작림(張作霖)의 계교로 중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일경에 넘겨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안 손정도는 동지 백영엽과 함께 백방으로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에게 직접 호소하여 결국 안창호 일행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손정도는 이어 길림에서 1927년 4월 1일 농민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인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창설하여 농촌의 교육, 영농기술 개발, 보건위생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중에도 목사로서의 직분도 충실히 감당하여 그가 담임하는 길림 한인교회 내에 유치원과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교포 2세의 교육과 민족정신 고취에 전심하였고 몸을 돌보지 않고 교포사회 발전에 헌신하였다. 이 당시 그가 〈기독신보〉에 기고했던 \"만쥬션교의 요구\"라는 글에서도 그의 목회자로서의 사명과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그 애절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이와 우리 만쥬션교 대야 내디에 계신 교희 형뎨자매가 간절 으로 을 합고 힘을 합야 후원을 해 주어야 겟슴니다. …… 인졍과 풍쇽이 다른 외국에 와셔 말 모르고 돈 업스니 엇더케 살켓슴니가\" 몬저 온 사의 소개로 국인의 집에 우거야 살게 되나 국인의 땅을 엇고, 국인의 량식을 먹으며, 국 사의게 돈을 빗내여 의복을 지으며 가용을 쓰게 되니 일년동안 농 후에 국 사람의게 임의 쓴 빗을 회계면 남는 것이 업지라 십년이라도 국 사람의 집에셔 떠날 슈가 없고 국인의게 죵사리가 되이다. 사오십만 동포를 부유 생활에셔 건져내는 것이 쥬의 뜻이 아니라고 자가 어잇겟슴닛가?\"(〈긔독신보〉, 1924. 8. 6, 8. 13)

또 북한의 김일성도 이 당시에 손정도의 길림에서의 활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80회 생일을 맞은 1992년 4월에 출간된 《세기와 더불어》라는 저서에서 그는 유년 시절부터 1930년까지의 회고를 하고 있다. 김일성은 자신의 삶에 기독교가 적지 않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아버지가 숭실학교 출신으로 평양에 있을 때부터 손정도 목사 집안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으며, 손정도 목사가 임시정부를 떠나 길림에서 예배당을 운영할 때, 김일성은 이 예배당을 대중 교양장소로 널리 이용했고, 손 목사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이렇듯 손정도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손정도 목사는 이와 같은 헌신적인 활동으로 결국 건강을 해쳐 1929년 교회 목사직을 사임하고 이듬해 신병 치료를 위해 봉천에 있는 둘째 사위 신국권(申國權, 당시 동북대 교수)의 집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가 길림을 떠나 있는 동안 길림에서 또다시 조선인배척사건이 일어나 교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다시 길림으로 돌아갔다. 그는 동남성(東南省) 주석인 장학량과 길림성장인 장작상(張作相) 등 요인들을 직접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교포들은 안정을 되찾았으나 그는 무리한 활동 때문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액목현(額穆縣)의 한 교포집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는 길림의 동양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결국 회복되지 못한 채 1931년 2월 19일 가족도 없는 외로운 병상에서 순직하였다.

그의 유해는 동포들의 손에 의해 길림성 북산(北山) 동쪽 기슭에 묻혔다가 1996년 9월 11일 국내로 봉환되어 그 다음날인 12일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하였다. 유족으로는 아들 원일(元一, 전 국방부 장관)과 원태(元泰, 의사, 재미)와 딸 진실(眞實, 애국부인회 사건 연루자, 재미), 성실(誠實, 신국원의 아내), 인실(仁實, 전 YWCA 이사장) 등이 있다.

-저서:《손정도 목사 목회수첩》(미간행).

-논문:\"조선의 변천을 논함\", 〈신학세계〉, 1916(제1권 1호);\"한국기독교 대표자들이 중국기독교에 고하는 글\", 〈신학세계〉, 1919. 4.

-참고문헌:배형식, 《고 해석 손정도 목사 소전》, 기독교건국전도사무소, 1949;김창수ㆍ김승일, 《해석 손정도의 생애와 사상 연구》, 도서출판 넥서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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