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서명학(徐明學, 1905. 12. 22~1990. 1. 28)
강원도 강릉 출생. 강릉에서 종교ㆍ교육사업에 종사했던 아버지 서광호(徐廣鎬)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강메례 사이에 8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서명학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할아버지는 틀림없는 아들이라 믿어 명학(明學)이라고 이름을 짓고 도장까지 새겨놓았다고 한다. 21살까지도 호적상으로 남자로 등기되어 있었다.
서명학은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교회학교인 의숭학교(義崇學校, 일제시대 때 강릉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됨)에서 교육을 받다가 노블(W.A. Noble), 빌링스(B.W. Billings)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상경, 1915년 이화여자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집이 부유했지만 1917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빨래를 해주는 등 일을 하며 고학하였다. 공부에 대한 열심은 물론이고 기미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여자로서는 생각도 못할 체육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1921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에 진학하였다. 1925년 봄에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이화여자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음악을 가르쳤다.
진정한 교육은 자기 자신의 완성을 기도하는 것과 병행해야 한다고 확신한 서명학은 1927년 4월 일본으로 가서 동경 길상사 체조음악학교(東京 吉祥寺 體操音樂學校)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 학생이었다. 육상, 농구, 테니스, 궁술, 야구, 축구 등 체육 전반에 걸친 기술을 배웠다. 1929년 졸업 이후 바로 귀국하여 그 해 4월에 다시 이화고등여학교에 부임했다.
일제하에서 이화의 체육을 지도하였고 1946년 9월에는 이화여자중학교 교무주임을, 1947년 5월에는 교감을 역임했고, 1951년 9월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교감을 맡았고, 이후 1961년 10월에는 이화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정년 퇴임할 때까지 교무 전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체육에 관련해서도 많은 공을 남겼다. 또한 체육진흥에 힘써 많은 국제선수를 배출했다. 1968년 문교부가 발표한 5대 일류 중학교 폐쇄에 대해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중학교가 없는 고등학교로서도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 놓았다. 학교 내의 프라이 홀, 스크랜턴 홀에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어 학교 환경 개선에도 힘썼으며, 1970년에는 본관을 준공하여 교실난을 해결했다. 유관순을 기념하는 뜻에서 1967년에는 유관순의 고향에 매봉교회를 준공하였고, 유관순기념관 건립을 위해 노력하여 1963년 기공식을 시작으로 1968년 5월 11일 착공하여 골조공사를 마치기도 했다.
이화여고 교장에 취임한 이후 서울신문사 제정 체육상 심사위원, 문교부 체육 심의위원, 서울특별시 체육 심의위원으로 국내 학교체육과 사회체육, 특히 여성체육 장려와 발전에 기여했고, 대한체육회 이사로서 우리나라 여성체육이 꽃필 수 있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71년 이화여고 교장에서 정년 퇴임하며 \"여자는 언제나 자기가 여자라는 긍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퇴임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