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변홍규(卞鴻圭, 1899. 5. 28~1976. 7. 27)
충남 천안에서 출생. 선교사의 권유로 공주 영명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 졸업하고 만주 안동으로 건너갔다. 여운형의 안내로 상해 임시정부의 김규식을 만나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김규식은 변홍규의 나이가 어려서 불가능하다고 거절하고 계속 공부할 것을 일러주었다. 그는 독일인 루터교 목사를 만나 그의 배려로 1919년에 청도에 있는 덕화서원을 졸업하고, 다시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변홍규는 1926년 미네소타 주에 있는 햄린(Hanmline)대학을 졸업했으며, 1928년 드류신학교에서 구약학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어학에 능한 그는 재학중에 독일어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29년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31년 6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업이 끝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제일감리교회의 담임자로 시무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잠시 만주 하얼빈에서 목회하다가 1934년부터 감리교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9년, 그는 일제에 의해 해임당한 빌링스 교장 후임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감리교신학교의 제6대 교장으로 추대되어 교역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1940년 6월 초 창씨개명 및 일본의 학정을 비난하는 격문이 감리교신학교 교정에 뿌려진 소위 감리교신학교삐라사건으로 기숙사 사감이었던 정형일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3개월 만에 풀려났다. 결국 학교는 그 해 10월 2일 정춘수 감독 등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의해 휴교가 결정되었고, 10월 3일 무기 휴교에 들어갔다.
석방된 변홍규는 1943년까지 종교교회에서,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동대문교회에서 목회생활을 했으며 한때는 친일적인 단일교단인 혁신교단의 통리자로 추대되기도 했다. 처음에 변홍규는 정춘수를 중심한 혁신교단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는 반(反) 혁신파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혁신교단 측이 일본 경찰의 협조를 얻어 한편으로 회유하고 한편으론 협박을 가하면서 반대세력을 제거해 나가자, 결국 이에 회유당하여 1942년 12월 교단 내 반발 때문에 취임하지 못한 김영섭을 대신해 통리자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6개월 만에 일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 후인 1945년 9월 8일 초교파적 단일교단을 유지해 가려는 남부대회에서 이규갑ㆍ나사행ㆍ김광우 등과 함께 감리교회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하여, 그날 동대문교회에서 감리교회재건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감리교회의 \"재건\"을 선언하였다. 이들 재건 측 인사들은 1946년 1월 14일 동대문교회에서 연합연회를 개최하고 감리교신학교를 재건하기로 결정하였고, 변홍규는 3월부터 수업이 재개된 감리교신학교의 교장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재건위원회는 4월 5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 및 동부연합회를 감리교신학교 강당에서 개최했는데 변홍규는 이 연합회에서 동부연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에 그는 1948년 감리교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남산교회에서 목회하였고, 소위 성화파ㆍ호헌파ㆍ정동파로 불리는 정치서클들이 노골적인 3파전을 벌이는 가운데 1967년 3월 특별총회에서 제10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감리교 목사이며, 감독이자 신학자였던 변홍규. 그는 구약을 강의하던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였다. 신학도 신앙도 보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엄격한 경건주의 원리를 실천하였다. 그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새벽 4시만 되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금요일 밤이면 반드시 철야기도를 했다. 그의 양복 주머니에는 언제나 헬라어 신약성경책이 들어 있었고, 잠시라도 빈틈만 있으면 이것을 꺼내 읽었다. \"그의 일생을 평한다면 성서를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모르는 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이런 그를 \"세인트 변\"(saint Pyun)이라 불렀다.
그는 1970년 5월 정년 퇴직과 함께 감독직을 사임하였고 이후 미국에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 한인 성서학원 및 신학교 교장, 콜로라도 주 덴버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76년 7월 27일, 7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저서:《신학원론》, 1949;《창세기 강해》, 1959;《성서개론》.
-논문:\"基督論\", 〈神學世界〉, 1937. 9(제22권 4호);\"道成人成의 聖誕\", 〈神學世界〉, 1957. 11(제1권 4호);\"마태복음 강해\", 〈神學世界〉, 1938. 3~1940. 8(제23권 1호~제25권 4호);\"말나기書 강해\", 〈神學世界〉, 1936. 11(제21권 5호);\"말세론\", 〈神學世界〉, 1939. 2(제24권 1호);\"모세의 科學思想\", 〈神學世界〉, 1937. 7(제22권 3호);\"미가書 강해\", 〈神學世界〉, 1936. 11(제21권 5호);\"뿌룬너의 기독론\", 〈神學世界〉, 1939. 2(제24권 1호);\"使徒의 召命\", 〈神學世界〉, 1940. 8(제25권 3\"4합병호);\"성경신학 개론\", 〈神學世界〉, 1936. 11(제21권 6호);\"성서신학 講座\", 〈神學世界〉, 1937. 3(제22권 1호);\"聖神論\", 〈神學世界〉, 1938. 3(제23권 1호);\"새가리아書 요해\", 〈神學世界〉, 1936. 11(제21권 6호);\"詩篇講解\", 〈神學世界〉, 1934. 5~1937. 9(제19권 3호~제22권 4호);\"옵아듸야書 要解\", 〈神學世界〉, 1936. 11(제21권 6호);\"요엘서 要解\", 〈神學世界〉, 1936. 11(제21권 6호);\"요한 웨슬레의 神學思想\", 〈基督敎界〉, 1957. 8(제1권 1호);\"이사야書 略解\", 〈神學世界〉, 1936. 9(제21권 4호);\"전도서 요해\", 〈神學世界〉, 1937. 3(제22권 1호);\"創世紀 要解\", 〈神學世界〉, 1937. 4(제22권 2호);\"現代神學思想\", 〈神學世界〉, 1938. 9(제23권 4호);\"호세아書 要解\", 〈神學世界〉, 1936. 11(제21권 5호);\"히브리詩學\", 〈神學世界〉, 1934. 1(제19권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