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배형식(裵亨湜, 1874~1955. 12. 26)
평남 출신. 1917년 3월 19일 협성신학교를 제5회로 졸업하였다. 1910년부터 진남포교회 권사로 활동하며 목회를 시작하여 1913년 평양지방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되고 구골교회로 파송되었다. 1914년 연회에서 학습인이 되었고, 1916년 3월 12일 집사목사로 안수받았다.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만주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만주 선교는 남감리교에서 1908년 9월 18일 이화춘(李和春) 전도사를 파송하면서 시작되었으나, 남감리회가 1909년 장로회와 선교협정을 맺어 간도지역을 캐나다 선교부에 이양하고 강원도지역을 대신 받는다는 합의를 거쳐 8월에 철수함으로 막을 내렸었다. 미감리회에서는 1910년 5월 손정도 목사를 만주지역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만주지역 선교를 시작했는데, 일제는 손정도 목사가 만주지역에서 민족운동가들과 상당한 교류가 있음을 감지하고 만주에 오는 일본 수상 가츠라 살해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러자 만주지역 선교에 큰 희망을 걸고 있던 미감리회는 1914년 연회에서 당분간 만주지역 선교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만주 선교가 재개된 것은 1918년 배형식을 만주지역 선교사로 파송하면서부터였다.
선교사 파송을 받고 그는 1년간 북간도를 위시하여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동부에 이르기까지 시찰 순회하면서 선교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실제로 선교사업에 착수한 것은 1921년 3월부터였다. 그 해에 장춘과 하얼빈에 교회를 설립했고, 사평가와 연화가에는 기도처와 예배소를 설치했다. 1922년에는 다시 흡라소, 영고탑, 도뢰소, 고유수, 무순, 봉천 등지에 예배처를 설립했다. 그리하여 북만주 일대에는 세례교인 1백 58명에 총 교인 수 4백 81명에 이르는 감리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남감리회와의 선교구역 분할 협의를 한 결과, 1922년에는 정재덕 목사가 길림에 주재하면서 설립한 길림교회와 동구역에 속한 신앙촌, 신참, 화전, 액목, 돈화돈교회를 1922년 12월 4일 남감리회 길림구역 담임자인 최수영 목사에게서 인수받았다. 또 해림구역에 속한 해림교회와 황귀둔교회를 1923년 당시 담임자인 장죽섭 전도사에게 인수받았다. 그리고 이어 오길밀과 흡라소에 예배소를 설치하여 1923년에는 기도처를 포함, 교회 수가 32처, 교인 수가 1천 3백 53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23년에는 이 지역의 선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주지방회를 별도로 조직하기에 이르고, 배형식은 만주지방 초대 감리사로 임명을 받았다.
또한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이룸으로써 만주지역의 선교사업이 재조정되었다. 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에서는 남.북만주와 몽고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교사업을 그대로 조선감리교회의 선교사업으로 인정하면서 앞으로 만주 선교문제를 취급할 특별위원을 선정했는데 배형식은 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정되어 만주 선교 상황을 연구하여 중앙협의회와 미국 감리교회 선교국에 보고함으로써 만주 선교사업의 지원을 요청하는 일을 맡았다. 1931년 12월 4일에는 제1회 만주선교연회가 열렸고, 만주지역의 선교사업을 2개 지방(북만지방, 동만지방) 15개 구역으로 정비하였다. 배형식은 만주선교연회에서 동만(간도)지방 감리사로 임명받았다. 한편 만주선교회가 조직될 무렵부터 그 해 발발한 만주사변의 영향과 각종 화적떼들의 침탈로 배형식이 맡고 있던 동만지방의 피해가 아주 심각하였다. 그는 1932년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지방을 순행하며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들은 바를 말하건데, 금년 5월 이후로 간도 일대에 각종 동란이 사방으로 궐기하였는데, 그 동란의 명색은 구국군(救國軍), 대도회(大刀會), 홍창회(紅會), 공산당(共産黨) 등 4비(匪)이며, 폭동이 매일 일어나 주민의 재산 침략, 인가 방화, 인질 납치, 인명 학살 등 악행을 일삼고 있다. 그들은 도적이니 유산자니 반공산주의자니 종교마취자니 하는 구실을 내세워 흉악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지역을 치리하고 있는 감리사로서 배형식의 노고가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31년 만주선교연회가 조직된 이래로 배형식은 1939년까지 동만지방 감리사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만주지역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데, 김영학ㆍ유찬희ㆍ박경철 등과 함께 간도지방 한족 독립기성회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 4월 간도를 대표하여 파리 파견 대표자에게 통신할 임무를 띤 연락책임자이기도 하였다.
배형식은 1939년 6월 3일 "배형식 감리사의 만주선교 21주년 사은회"를 가진 후 만주선교활동을 마감했다. 그는 감리사 보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은퇴의 감회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감사한 것은 교제가 만주선교사업을 사명받고 사역한지 21주년이 된 금일에 동북만주에 교회가 50여 처가 달하야 19구역 2지방회 1연회가 조직되어 연회원 50여 인의 달하였고 선교사업이 점진적으로 자치교회가 실현케 된 것이 실로 감사하옵고 교제가 어언간 은퇴연한을 당하게 되어 동만지방 감리사직을 사퇴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아(我)는 쇠하여야 하겠고 피(彼)는 흥하여야 한다 한 말씀과 여(如)이 여(余)는 길을 예비한 자요 기초를 정한데 불과합니다. 예비한 기초 우에 건축할 자는 후진 교역자들이오니 교제가 끊임없는 기도로 소망하는 바는 후배교역자가 교제의 부족을 만족케 하야 예비한 전정(前程)으로 진흥케 하고 개척한 기초에 건축을 다대히 할 것이면 교제는 노어사간(老於死間)의 호무여한(豪無餘恨)일뿐 아니라 이후 영혼자아로 하나님께 무괴(無愧)한 보고자료가 생기리라고 자신합니다."
그 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1950년 이후 담임자가 없는 수색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55년 12월 26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12월 29일 류형기 감독의 집례로 거행되었다.
-저서:《고 해석 손정도 목사 소전》, 기독교건국전도사무소,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