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배덕영(裵德榮, 1901~1950 ?)


교육자

경기도 개성에서 배선범(裵善範) 목사의 아들로 출생. 1921년 개성 송도학교를 거쳐 1925년 연희전문학교, 1928년 1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제14회로 졸업하였다. 1929년 9월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26년 자교교회 전도사, 1930년 개성 중앙회관 총무 및 총리원 교육국 간사로 봉직하였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미국에 있는 스카릿대학에 유학하여 종교교육학을 전공하였고, 귀국 후 다시 총리원 교육국에 재임하여 아동교육 분야에서 많은 활약(유년ㆍ소년부 교과서, 성극집, 동화집 등 출간)을 하였다. 특히 그는 주일학교 각 부 조직과 관리문제를 연구하여 확정 발표하고, 〈교리와 장정〉에 편입시켜 제도화시켰으며, 각 부에서 사용할 교과서의 커리큘럼을 작성한 후 이를 종교교육 전문가들(김창준, 임영빈, 류형기 등)에게 의뢰하여 발간하는 등 주일학교 조직 완성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1940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해방 후에는 성화여학교) 교장으로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배덕영은 북한지역의 교회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평양에 신학교를 세울 것을 구상하였다. 그는 남산현교회의 송정근, 서평양교회의 박대선 등과 협의하여 이 계획을 구체화하고 1946년 9월경 평양 평양시 수옥리 334번지에 성화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당시 성화신학교는 1947년 봄까지 모집한 학생 수가 6백 명이나 되었다.

한편 일제 말기 교회 조직을 친일 어용 기구로 전락시킨 정춘수의 혁신교단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친일화 작업에 반대하는 감리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당국에 의해 \"목사직 파면\", \"대기 명령\"을 받고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사정당국에 의해 체포ㆍ구금되기도 했는데, 배덕영은 \"교단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류형기ㆍ이윤영ㆍ이환신ㆍ송정근 목사 등과 같이 파면당했다. 해방 이후 그는 송정근ㆍ이진구ㆍ이피득ㆍ조윤승 목사와 함께 서부연회 재건작업을 주도하여 1946년 10월 평양중앙교회에서 서부연회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서부연회는 곧 수난의 역사로 이어졌다.

남쪽 교회가 해방 이후 \"재건파\"와 \"복흥파\"로 나뉘어 혼란을 겪는 동안 북쪽 교회는 공산주의 정권 수립으로 인해 수난을 겪었다. 1945년 11월 공산주의 정권 수립에 협력하기 위한 기독교 전위단체로 \"기독교도연맹\"이 조직되었는데 초교파 기구로 조직된 기독교도연맹은 종교 통합과 지원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된 것으로서 이 조직에 반대하거나 가입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도연맹은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가입을 강요하며 조직적인 종교탄압을 가했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북한에서 목회하던 교역자들은 대거 월남하기도 하였다. 배덕영은 해방 후 북한지역 감리교회를 이끌고 있던 지도자였기 때문에 기독교도연맹은 그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9년 12월 그가 거주하고 있는 성화신학교 관사에 기독교연맹 선전부장 박승채가 찾아와 북조선 기독교도연맹 위원장직을 수락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배덕영은 \"기독교연맹이라는 게 무엇 때문에 생겼소? 교회를 괴롭히는 것 외에 무엇을 했단 말이오? 못하겠소\"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그 일로 공산당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 후 12월 16일 배덕영은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성화신학교 성탄축하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공산당에 의해 납치되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1950년 10월까지 평양감옥에 수감되다가 총살되었다고 한다.

-저서:《성가집》, 《주일학교조직관리》, 《하기아동성경학교지침》, 《주교청년사업지침》 등.

-논문:\"童話와 兒童說敎\", 〈神學世界〉, 1935. 5(제20권 3호);\"청춘기의 종교교육\", 〈神學世界〉, 1934. 7(제19권 4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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