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방현덕(方賢德, 1926. 8. 11~1991. 8. 18)


여성운동가

평남 평양에서 출생. 감리교신학대학과 미국 스카릿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 4월 세례를 받아 입교했으며 1973년 서울 시온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1977년 장로 취임예배를 가졌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정생활위원회 총무 겸 월간 기독교잡지인 〈새가정〉 주간으로 활약하여 초교파적 교회여성운동에 기여했다. 가정생활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 잡지 〈새가정〉 발행이다. 〈새가정〉은 본래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하던 잡지였다. 1949년 1월에 \"기독교가정\"(基督敎家庭)이란 제호로 창간된 월간지였는데 6.25전쟁으로 정간되었다가 1954년 1월 복간될 때 \"새가정\"으로 바뀌어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서회에서 발행하던 어린이잡지 〈새벗〉과 함께 기독교 가정잡지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그러나 1957년 서회에서 종합 신학잡지로 〈기독교사상〉을 창간함에 〈새가정〉 발행권을 한국기독교연합회 가정생활위원회에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1957년 6월호(제4권 6호)부터 가정생활위원회에서 발행하게 되었다.

또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1974년 4월 26일, 제42회 전국대회에서 전국연합회 부회장에 배계영과 함께 선출되었고 회장에는 김옥라가 선출되었다.

1977년에는 정식으로 여선교회관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위원으로 참여하여 여선교회관 건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옛날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 교사로 쓰이다 감리교신학대학 남학생 기숙사로 쓰이고 있는 충정로 건물을 구입하기로 하고 1977년에 계약하였지만 학교 측에서 팔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 건물 구입은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미국 연합감리회 선교부에서 1962년 이래로 사용하던 \"힐사이드 하우스\"(Hillside House)라는 건물을 처분한다는 소식에 이를 구입하게 된다. 선교부는 이 건물을 여선교회에 양도하고 여선교회는 선교부에 선교기금을 기부하는 형태로 건물 소유권을 여선교회에 넘겨주었다. 형식상 \"기부\"였으나 여선교회로서는 1억 3천여만 원을 지불하고 구입한 것이다. 이로써 한남동 여선교회관이 마련되었다.

1981년부터는 전국대회와 별도로 총회를 소집, 임원을 개선했는데, 그 해 12월 15일 제27차 총회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하고 김옥라 후임으로 방현덕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회장ㆍ부회장ㆍ서기ㆍ회계 및 각 부장 임기가 4년에서 2년으로 줄었는데 이는 감리교회 감독 임기가 4년에서 2년으로 준 것과 연관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방현덕 회장은 1983년 총회에서 1차 중임을 허락받아 1985년까지 수고하였다.

1981년 7월 13일부터 21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그 해 12월 15일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1985년까지 봉직했고, 1987년부터는 자문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녀는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교회 여성의 정치 참여운동을 전개하여, 1984년 감리교회 총회에서 모든 감리교회 의회 기구에 평신도 대표의 30%를 여성으로 한다는 규정을 통과시키는 큰일을 했다. 그 후 감신대 교수, 한미합동위원회 대표위원 등을 역임했다. 여선교회 사업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1987년 이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들의 사업과 운동을 격려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1991년 8월 시온교회의 수요예배를 사회하다가 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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