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방인근(方仁根, 1899~1975. 1. 1)
충남 예산군 예산읍 금오산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때 이미 독실한 세례교인이었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거쳐 주오(中央)대학 독문과를 수료하였다.
1924년 10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전 재산을 털어 종합문예월간지 〈조선문단〉을 창간하였고, 그 자신은 문단 초년생이었던지라 춘원 이광수에게 편집 주간을 맡겼다. 국판 69면의 창간호에는 주요한ㆍ정태연 등의 시와, 이광수ㆍ전영택ㆍ방인근ㆍ최서해의 소설, 그리고 주요한ㆍ이광수 등의 논문이 실렸다. 4호부터는 방인근의 이름으로 발행하였으며, 1926년 6월 1일 통권 17호를 발간하고 휴간하였다가 1927년 1월 1일 속간하였으나 곧 휴간하였다. 1935년 2월 이학인에 의해 재차 복간되었다가, 1935년 12월 통권 26호로서 종간되었다. 〈조선문단〉은 이제까지의 동인지 성격을 벗어나 기업적으로 운영한 문예지라는 데 특징이 있으며, 같은 해 계급주의(프로문학)적 경향을 띠고 창간된 〈개벽〉(開闢)의 박영희ㆍ김기진 등에 맞서 민족문학의 순수성을 제창한 것으로서 의의가 크다. 이 문예지를 통하여 활동한 사람으로는 이광수ㆍ방인근ㆍ김동인ㆍ염상섭ㆍ나도향ㆍ김억ㆍ주요한ㆍ전영택ㆍ현진건ㆍ박종화ㆍ김소월ㆍ이상화ㆍ양주동 등 당시의 문단인 거의가 참여하였으며, 최초의 \"신인 등용 추천제\"를 실시하여 최서해ㆍ채만식ㆍ박화성ㆍ임영빈ㆍ계용묵 등의 소설가와 조운ㆍ이은상ㆍ유도순 등의 시인이 신인 추천을 통해 문단에 등단하였다.
한편 잡지 창간 이후 몇 해 만에 전 재산을 탕진한 그는 1927년 평북 영변에 소재한 기독교 계통의 숭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상경, 1929년 5월 평양에서 그가 편집 겸 발행인을 맡고 양주동이 주재하여 순문예월간지 〈문예공론〉을 창간하였다(국판 162면).
창간호부터 일제의 검열로 고초를 겪었는데, 권두논문인 김기진의 \"프로문예의 대중화\"는 검열에서 삭제되어 제목만이 실렸다. 당시 민족주의문학의 의견을 대변한 염상섭의 논문 \"문학상의 집단의식과 개인의식\"과 최남선ㆍ이광수ㆍ정인보ㆍ이은상의 시조, 김억ㆍ박종화ㆍ김소월ㆍ이장희ㆍ양주동의 시, 그리고 한설야ㆍ염상섭ㆍ최독견의 소설이 실려 있다. 1925년 이후 계속되어 온 〈개벽〉, 〈조선지광〉 중심의 사회주의문학과 〈조선문단〉 중심의 민족주의문학 사이의 대립을, 양주동과 염상섭의 절충주의로서 수습하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1929년 6월 10일에 간행된 2호에는 김기진ㆍ한설야ㆍ양주동ㆍ문일평의 평론과 김동인의 장편 \"태평행\"(太平行) 제1회, 한설야ㆍ이태준의 소설과 많은 신인들의 추천시ㆍ입선시가 특집으로 꾸며졌다. 같은 해 7월에 간행된 3호에는 현진건ㆍ전영택의 소설, 방인근의 희곡, 김소월의 시 \"단장\"(斷章) 등이 특기할 만한 내용이었으며, 이로써 종간되었다. 이후 〈신생〉(新生)의 편집부장(1931), 〈시조〉(時兆)의 편집국장(1935), 방송국 촉탁위원(1943)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 〈신생명〉 8월호에 시 \"하늘과 바다\"를 발표함으로써 문필생활을 시작한 그는, 같은 책 9월호에 단편 \"분투\"를 발표하면서 소설로 전향하였고, 이어 \"어머니\"(〈조선문단〉, 1924. 10), \"비오는 날\"(〈조선문단〉, 1924. 11), \"살인\"(〈조선문단〉, 1924. 12~1925. 3), \"죽지 못하는 사람들\"(1925), \"외로움\"(1926), \"최박사\"(1926), \"노총각\"(1926), \"자기를 찾은 자\"(〈동광〉, 1926. 8) 등의 소설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문학적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28년대에는 전영택ㆍ임영빈ㆍ이은상 등과 함께 기독교문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무렵 그의 기독교소설 \"새 나라를 찾아서\"가 〈기독신보〉에 연재되었으며, 그가 작사한 어린이 찬송가 \"감사일 노래\"가 《아동 가요곡선 삼백곡》(강신명, 1936)에 실리기도 했다.
이후 1930년대에 차차 대중작가로 인기를 끌게 되면서 기독교적 색채를 떠나기 시작했고,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괴청년\"이 불온사상 혐의로 일제에 의해 중단되기도 했으나, 장편 \"마도(魔都)의 향불\"(〈동아일보〉, 1934),\"화심\"(1935),\"쌍홍무\"(1939),\"방랑의 가인\"(1939),\"젊은 아내\"(〈매일신보〉, 1942),\"동방의 새봄\"(〈매일신보〉, 1944) 등의 대중소설이 발표되면서 인기작가로 부상하였다.
한편 그는 일제 말기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939년 10월, 국민문학의 건설\"내선일체의 구현\"총력전 수행에의 적극적 협력 등을 목적으로 창립된 이 단체에는 김기림,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상용, 김소운, 김억, 김용제, 김형원, 박영희, 박태원, 방인근, 백철, 유진오, 이광수, 이극로, 이기영, 이태준, 이하윤, 임학수, 임화, 전영택, 정인섭, 정지용, 조용만, 최재서, 함대훈 등이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이 단체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어 말살정책 등 조직적인 친일문학활동이 전개되었다. 이후 많은 반민족적 행사를 주관하다가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로 흡수되었다.
해방 후 장편 \"명일\"(明日, 1947),\"고향산천\"(1948),\"애정쌍곡선\"(1954),\"인생극장\"(1954),\"청춘야화\"(1955),\"동방춘\"(1956),\"정열의 애인\"(1957) 등이 계속 출간되면서 그의 대중적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는 완전히 세속화된 듯했으며, 그의 이름을 도용한 저속소설들이 나돌아 \"방인근\" 하면 \"속된 소설\"을 떠올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나는 언제나 향수처럼 교회를 그리워하고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듯 나도 돌아가야겠다는 마음 간절하다\"고 밝히고, 최후의 역작 \"탕자 주께 돌아오다\"를 집필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비록 그가 수준 높은 작품으로 화제에 오른 적은 없으나, 대중소설의 저변확대와 〈조선문단〉 등을 통해 문학사에 끼친 공헌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한편 1920년대에 이미 기독교문화운동에 시선을 모았다는 것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