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박희도(朴熙道, 1889. 8. 11~1951. 9. 21)


사회운동가

황해도 해주에서 박계근(朴桂根)의 차남으로 출생. 해주 의창학교에 입학하여 보통과, 고등과를 졸업하였으며 16세가 되던 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퇴학하였다. 1917년 영신학교(매동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선교사 베커(A.L. Becker, 白雅德)가 교장으로 있던 협성보통학교(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초등학교)의 부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16년 9월에는 장낙도, 유양호 등과 함께 정동교회 유치원의 분원으로 중앙교회에 중앙유치원(현 중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 운영하였다.

3.1독립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박희도는 3.1운동 당시 중앙교희의 전도사로 사무하였고(〈기독교미감리회 조선연회록〉에 의하면 1917년부터 창의문밖교회로 파송받았다), 1918년 10월부터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우부 간사를 맡아 청년,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이 같은 지위를 잘 활용하여 33인 가운데에 기독교 측 참모로서 33인의 운동이나 학생운동의 주모자가 되어 연락과 회계를 담당하였다. 도쿄 한인기독교 청년회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박희도는 1919년 1월 20일 경기도 이천읍교회에서 열린 겨울 지방 사경회에서 동석기를 만나 대화하면서 세계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하와이 이민으로 미국에 갔다가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내리교회를 거쳐 남양교회에서 목회하던 동석기는 \"미국 신문을 구독하는\" 국제통 목사였다.

박희도는 서울로 올라와 기독교청년회 학생부에 참여하고 있던 강기덕, 김원벽, 김형기, 주익 등 시내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 대표들을 소집하였다. 또한 2월 17일 남감리회 소속 목회자였던 오화영, 정춘수와 만나 남.북감리교회 민족운동 세력 연대의 뜻을 모으고 즉시 동지를 모았다. 박희도는 미감리회 구역을 맡아 정동교회 전도사이자 〈기독신보〉 주필인 박동완과 중앙교회 전도사 김창준, 해주읍교회 목사 최성모, 수원 삼일학교 교사 김세환 등을 포섭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연합으로 미국 감리교 선교 백주년을 기념하는 연합집회를 열고 있었는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온 지방 목회자들은 박희도의 기독교청년회와 협성학교 사무실을 자주 찾았다. 또한 당시 서울에 올라와 있던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 신홍식을 통해 평북 오산학교 설립자였던 이승훈과의 만남이 2월 19일에 이루어졌고, 이들의 만남을 통해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북쪽과 남쪽의 민족운동 세력이 연결되었다. 이와 같이 박희도는 3.1독립운동의 실무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그는 3월 5일 명월관에서 다른 민족 대표들과 함께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을 복역하고 만기출옥하였다. 그는 출옥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슨 별 감상이 있겠습니까.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 늘상 우리 동포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 나의 가슴에 차인 정성은 오직 가련한 우리 동포를 조금이라도 구원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올시다.\"(〈동아일보〉, 1921. 11. 5)

출옥 후 그는 한때 용두리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이후부터는 교역의 일보다는 사회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1923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교역에 종사치 못할 형편임으로 계속치 않기로 가결\"되었다.

그는 교육과 출판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김명식, 신일용, 유진희 등을 편집진으로 1922년 3월 〈신생활〉(新生活)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신생활〉은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수차 검열과 삭제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1922년 11월에 발간한 제13호 기사를 트집잡아 박희도를 비롯한 편집진들을 검거하였다. 결국 박희도는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 말경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재건된 중앙유치원 사범과 교사로 있었으며, 1928년에 이 사범과가 중앙보육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으면서 초대 교장에 취임하여 1932년 임영신에게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단일전선을 목표로 한 1927년 2월 15일의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었으며, 1929년 7월 1일의 전국복수대표자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민족운동을 위해 애쓰던 박희도는 1930년대 후반부터 친일\"매국의 길을 걸었다.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지역에서 학병모집 독려강연반에 참가하였다. 1939년 1월부터는 잡지에서의 조선어 사용 전폐가 최초로 실시된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하여 황도문화 수립에 앞장섰다. 그리고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10. 16) 참사, 조선임전보국단(1941. 10. 22)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1945. 6. 8)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이 승리할 시는 조선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일제에 대해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되어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조사에서 풀려난 후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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