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박인덕(朴仁德, 1897~1980. 4. 3)


교육가

평남 용강에서 유학자인 박영하(朴榮夏)의 5남 1녀 중 맏딸로 출생. 1902년 전국을 휩쓴 콜레라로 부친과 형제를 모두 잃고 어머니와 둘만 살아 남았다. 실의에 빠진 모녀는 친척의 권유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박인덕은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진남포의 삼성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였다. 졸업한 그 해 동창인 윤심성(尹心聖)의 권유로 서울에 유학하여 1912년 이화학당 중학과를 졸업하였고, 1916년에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제3회로 졸업하였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모교에서 기하ㆍ체육ㆍ음악을 맡아 가르쳤으며, 당시에 그는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알려져 있어 프라이(L.E. Frey) 당장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화학당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박인덕은 3.1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들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동료교사 신준려(申俊勵)와 더불어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출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해 11월 초교파적 교회연합운동의 성격을 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조직이 경찰에 탄로나 \"이화학당 내 회원 20명 대표자\"로 또다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연이은 두 번의 투옥 후에 그는 이화학당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21년 아펜젤러(A.R. Appenzeller)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렸으나 이를 포기하고 김운호(金雲鎬)라는 부호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파경을 맞게 되어 배화학교 교사(1921~1926)로 다시 교육에 복귀하였다. 그 후 배화학교의 교사였던 루비 리(Ruby Lee)의 협조로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려 1926년 조지아 주의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여 사회학석사 학위를 받고 1928년 졸업하였으며, 계속하여 콜롬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고 1930년 졸업하였다. 미국에서도 그는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적극 호응하여 각지의 대학에 나가 강연하고 미국은 물론 유럽 각지에 조선을 소개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1931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황애덕ㆍ최활란과 함께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 등을 열었으며, 농촌여성에 대한 계몽운동에도 참가하여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41년,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 딴 덕화(德和)여숙을 개설하여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1년 과정의 직업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즈음 박인덕은 \"영하인덕\"(永河仁德)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같은 해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참가하여 김활란과 더불어 위원이 되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학병을 동원하기 위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적 단체나 각종 토론회ㆍ강연회의 연사로서 활동하였다.

박인덕은 해방 후인 1946~1947년 미군정 장관 러치와 하지의 요청으로 미국에서 개최된 자유국가 여성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강연하였고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리기도 하였다. 1954년 미국 순회강연을 하던 중 캔터키에 있는 베리아(Berea)칼리지란 실업학교를 방문하고 이 학교의 교육제도 및 시설에 매료되어 한국에도 이와 같은 유형의 실업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였다. 이후 미국에서의 저술활동과 강연을 통해 얻은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서울 성북구 월계동에 3만 6천 평에 달하는 대지를 구입하고 \"인덕실업학교\"를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또한 1955년 9월 미국 워싱턴에서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재단법인 부려재단(Berea in Korea Foundation)을 설립하여 1980년 4월 3일 서울에서 별세하기 전까지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저서:September Monkey;The out of Tiger;The Wisdom of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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