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박연서(朴淵瑞, 1893. 12. 27~1950. 9. 19)


순교자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淸潭)에서 박성호(朴聖鎬) 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1년부터 한문을 수학했고 1902년 어머니를 여의고 백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908년 경성에 소재한 보성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0년 3월 개성 보창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2년 12월 세례를 받았다. 1914년 전도를 시작하여, 강원도 인제구역장(1914. 4~1915. 3)을 맡아 교역하였으며 1917년 6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3월부터 1917년 8월까지 서석구역에서 목회하였으며 1917년부터는 철원구역에서, 1919년부터는 화천구역에서, 1922년부터 연천구역에서 시무하였으며, 1923년 9월에 집사 안수를 받았다. 1923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4년 감-장연합공의회에서 일본 칸사이지방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위하여 파송되었다. 이곳에는 약 10만의 한국 교포가 살고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한편 권익보호를 위해 파송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4년간의 선교활동을 마치고 1927년 귀국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어 강원도 철원, 화천, 경기도 연천, 서석, 포천 등지에서 교역하였다. 이후 김춘배, 최경식 등과 함께 기독신보사를 통해 문서활동에 종사하였고, 1933년까지 〈기독신보〉 주필을 역임하였다. 1934년에 다시 목회일선에 돌아와 석교교회, 원산중앙교회, 서울 남산교회 등지에서 1948년까지 목회하였다.

1932년에는 기독교신앙의 생활화를 통해 사회를 개조해 나가려는 적극신앙운동을 주창하던 신흥우의 선언에 감리교에서는 박연서와 함께 정춘수, 유억겸, 김인영 등이 호응하며 나섰다.

특히 그는 1934년 이후 목회하는 동안에 교역자의 제도와 자격심사 문제에 관여하였고 연회경계심사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구성서, 배형식, 이동욱, 오기선, 황치헌 목사 등과 같이 많은 법령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또 새 법을 제정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연회 파송, 안수례, 감리사제, 연회실행부 설치 등은 모두 그에 의해서 수정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1939년은 조선 감리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는 때였다. 서울에서는 10월에 교역자회의를 열고 조선 감리교회 창립 10주년 기념 대전도회를 열기로 하였는데 11월 27일부터 전도회를 열었다. 시내 구역에서 박연서 목사는 \"인생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전도회를 인도하였고, 공덕정감리교회에서는 \"예수의 청년훈\"이라는 제목으로도 강연하였다. 전도대회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교단에서는 점차 변화를 예고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즉 한ㆍ일 감리교회의 합동을 추진하는 문제였다.

또한 1940년 일제는 전시동원 체제를 갖추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 정책을 폈다. 이에 순응하여 1940년 7월에 감리교회도 국민정신총동원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을 결성하고 \"우리는 이에 일치단결 국민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고 또한 복음선전사업을 통하여 성전(聖戰) 궁극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당시 감리회연맹의 이사장은 정춘수였고, 이사진으로 박연서 목사가 참여하였다. 또한 그 중심 조직에서 박연서는 선전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박연서는 1941년 혁신교단 아래 다시 개학한 감리교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1940년 감리교신학교에서는 6월에 이른바 일제의 만행 규탄과 신사참배 거부 등의 내용을 담은 \"삐라사건\"으로 인해 변홍규 교장과 라사행 등 10명이 구속됨으로써 어수선한 상황 속에 있었다. 그리고 감리교신학교가 무기 휴교 되었는데 그 해 10월 2일 총리원 이사회에서 교회 혁신안이 통과되면서 단행되었다. 바로 혁신된 신학과 신학교육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혁신 주도자 중의 한 사람인 박연서 목사는 신학교육 혁신에 대해 해명하는 글을 〈조선감리회보〉에 발표하였는데 복음을 왜소화시키며 서양 문화를 배척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일본 제국주의와 그 정신적 기초인 신도사상과 보조를 맞추어 현대 기독교회가 형식화되고 무능하여졌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 신학교는 교역자들의 전시 대응 강습회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제1회는 1941년 10월에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주최로 열렸다. 그 목적은 \"현하 시국이 날로 긴박해감에 따라 본 교단의 교역자들로 하여금 시국의 인식을 철저히 하는 동시에 임전태세를 정비함으로써 정성을 다해 종교보국의 열매를 거두는 데 있다\"고 하였다. 당시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에서 박연서는 중앙위원인 선전주임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연맹을 이끌고 있던 사람들은 이사장에 정춘수, 상무이사 겸 총무부장에 심명섭, 기획주임에 이동욱, 서무주임에 장기형, 문화부장에 김인영, 후생부장에 김수철 등이었다.

박연서는 1941년 연회 해산과 더불어 그 해 3월 6일 혁신교단 창립총회에서 중앙위원인 선전주임으로 선출되어 경성교구장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6년 6월에 남산교회로 부임, 1948년에는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지병인 중풍 때문에 피신하지 못했다. 1950년 8월 23일 공산당이 전국에 비밀지령을 내려 종교인과 유명인사들을 납치하도록 하였는데 박연서 목사도 이날 공산군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되어 9월 19일 58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같은 해 9ㆍ28수복 후에 고향 선산(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으로 이장하였다. 1963년 3.1절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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