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박두성(朴斗星, 1888~1963. 8. 25)


한글점자 창안자. 본명은 두현(斗鉉). 호는 송암(松庵)

구한말인 고종 25년,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번지에서 박기만 씨의 6남 3녀 중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8세가 되던 1895년 7월 무관 출신 성제(誠齊) 이동휘(李東輝)가 강화도에 세운 보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보통학교의 신학문을 수학한 후, 이동휘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6년 이를 졸업한 후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교사로 발탁되어 8년간 근무하였다. 그 후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盲啞部, 서울맹아학교 전신) 설립과 함께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맹인교육에 전념하였다.

1920년 한글 점자연구에 착수하여 1926년 이를 완성하고 "훈맹정음"이라 명명하여 반포하였다. 같은 해 정창규의 집에 육화사(六花社)라는 간판을 내걸고 점자연구와 점자통신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박두성은 점자성서 출판에 관심과 노력을 쏟기 시작하였는데, 1931년 한글 마태복음 원판 출간에 착수하여 그 해 9월에 완간하였고, 이후 1941년에 신약성서 점자원판을 완성하였다. 1935년에는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한글 점자투표(點字投票)를 인정받았으며, 1936년 12월에는 점자찬송가를 완성했다.

한편 1935년에 제생원 교사를 정년퇴임한 후, 1936년 인천 영화학교(永化學校) 교장으로 부임하여 1939년까지 봉직했다. 해방 후 1947년 잠깐 동안 인천 율목동 동장을 역임한 바도 있으나 이내 맹인선교에 뜻을 두어 사임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점자투표권을 재승인받았으며, 그 해 점자신약성서 출판이 완성되었다. 일제시대를 지나오며, 그것도 점자로 성서를 출판하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로 밤에 아연판과 흰 종이에 점을 찍는 일이었는데, 이 일을 10여 년 동안 새벽 4~5시까지 무리하게 하여 시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이후 6.25전쟁으로 신약의 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자 또다시 제작에 몰두하여, 1957년에는 성경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했다. 때로는 재정의 곤란을 겪어 사재를 털어 가면서까지 점자서적 출판에 진력하여 《3.1운동사》, 《국사》, 《순애보》, 《사랑》, 《금삼의 피》, 《임꺽정》, 《천기대요》, 《천자문》, 《명심보감》, 《위인전》, 《범일지》, 《이솝우화》, 《속담집》, 《홍경래전》, 《여명》, 《침구요혈》 등 성경을 비롯한 76종의 맹인용 교육자료를 점역\"출간하였다.

그는 국가와 사회단체에서 많은 감사와 표창을 받았다. 1928년 12월 1일 경성부 교육회의 표창을 받았고, 1934년 7월 29일 일본 맹인교육회의 표창을 받았으며, 1962년 8월 15일 정부의 문화포장을 받았다.

기독교 신자로서 서울 정동교회와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에 교적을 두었으며, "한국맹인사업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맹인선교에도 헌신하였던 그는 1963년 별세하였다. 부인 김경내(金景乃, 1894~1973)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2002년 4월 문화관광부는 그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기념행사와 강연회를 열었다.

그의 시각장애인 교육관은 "애맹정신의 실천", "끊임없는 권학정신", "생활자립을 위한 교육강화", "잠재능력 개발"이었으며, 이에 평생 동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의 위대함은 앞서 살펴본 바, 한글점자 창안은 물론 보급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계의 문맹퇴치에 기여한 것이다. 성경을 비롯해 76종의 맹인용 교육자료 도서를 점역ㆍ출간하였으며, 점자도서 보급사업ㆍ통신교육사업 실시ㆍ주간 회람지 〈촛불〉 발행 등을 통하여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한글점자를 생활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조선어점자연구회ㆍ육화사 등의 연구조직을 결성, 한글점자를 더욱 연구함으로써 그 실용성을 높였다.

그의 신념은 시각장애교육이 단지 장애인 교육이나 자선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직업교육과 더불어 시각장애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 양성과 민족정신을 싹 틔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일제 치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모든 학교의 조선어교육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제생원에서는 우리말과 글의 공교육이 계속되도록 하였다. 그의 다음과 같은 애절한 진정이 총독부를 설득했던 것이다.

"…… 실명이라는 1차적인 신체적 장애에 시각장애인이 마음대로 읽고 쓸 한글점자가 없으면 시각장애인의 심안을 밝히지 못하며 이로 인해 제2차, 3차로 장애가 중복ㆍ심화되어 정서불안, 열등감, 비사회적 행동의 부차적 장애를 가져오게 되므로 점차 이질적인 방향에로 고착화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장애를 예방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각장애인에게 문자를 주어 그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

당시 구전식 교육과 점복업을 주로 하는 시각장애인의 생활기반에 박두성이 시각장애교육에 투신함으로써, 한글점자의 창안과 보급" 교수학습방법의 기반 연구 등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교육은 그 당대에 거의 현대적 모습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직ㆍ간접적으로 시각장애자 지도자, 교육계ㆍ종교계ㆍ의약계ㆍ예술계의 박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우리나라 사회에 배출하게 했다. 그는 우리나라 모든 시각장애인의 정신적 지주임과 동시에 애맹사상가로, 그 불멸의 업적은 오늘날은 물론 후세에까지 길이 빛날 것이다. 그는 진정 "맹인들의 세종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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