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박동완(朴東完, 1885. 12. 27~1941. 2. 23)
경기도 포천에서 박형순(朴馨淳)의 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위로 형과 누이가 있었던 그는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환경에서 자라 다섯 살 때부터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다. 열세 살 때는 포천의 명문가 현석윤(玄昔運)의 딸(현미리암)과 결혼하였다. 1901년 그의 가족은 서울로 이주, 수하동에 정착하였다. 그는 양사동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어 관립고등소학교\"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 영어를 전공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가 폐쇄되면서 배재학당 대학부에 전입, 비로소 기독교를 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졸업 후 감-장 연합으로 발행되던 〈기독신보〉 서기로 근무하면서 언론에 발을 들여놓았고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목회도 시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최병헌ㆍ손정도ㆍ이필주 등 정동제일교회 목사에게서 민족주의적 신앙을 전수받았고 언론 기관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도 폭넓은 교제를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국외정세에도 누구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하여 우리 민족도 독립에의 의지를 세상에 밝혀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3.1운동 참여가 이루어졌다.
1919년 2월 20일경 YMCA 간사 박희도(朴熙道)를 기독신보사 사무실에서 만나 자신의 독립운동 의지와 그때까지 은밀하게 추진되던 독립선언운동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박희도는 기독교 측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동완의 강력한 의지는 이승훈, 이필주, 함태영 등 지도급 인사들에게 전달되었고 마침내 27일 낮 이필주의 방에서 이루어진 기독교 대표자 서명에 그도 참여하게 되었다. 3월 1일 명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검사심문(1919. 3. 18)에서
검 사:피고는 조선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하는가?
박동완:그렇다. 일본과 열국들이 허락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검 사: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박동완:물론 그렇다.
경성지방법원 예심(1919. 5. 2)에서
판 사:자결(自決)이란 여하한 것인가?
박동완:자결이란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조선을 일본의 정치에서 이탈하여 독립하려고 생각하였다.
박동완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1년 11월 5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방해공작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언론 및 교회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근무하던 〈기독신보〉 주필이 되어 신문 편집을 계속하였고, 1924년에는 민족적 신앙인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문화사업단체 조선기독교창문사의 기관지 〈신생명〉의 주간에 취임하였다. 〈신생명〉에서는 3.1운동 이후의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 내용과 편집을 통해 확인된다.
\"진리를 좃는 자는 반다시 이길 것이오 진리를 거역하는 자는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갓치하야 삼각산에서 죽기를 맹세하고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를 선호하야 이에 진정한 문명을 건설하랴고 이러난 사람이 中치즘 가서 정치가로 또는 여러 방면으로 변하는 사람은 아모대도 쓸대가 없는 사람이올시다.\"
그의 글은 항상 일제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그만큼 일제의 압력은 가중되었다. 그래서 결국 1925년 한때 교계 일에서 손을 떼고 경성공업사란 회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당시 국내에 민족단체들이 총동원된 새로운 민족운동단체, 신간회(新幹會)가 창설되었다. 이때 박동완은 이상재, 조만식, 유억겸, 이갑성, 이승훈 등과 함께 기독교계 대표로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그는 상임간사가 되어 실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928년 1월에는 당시 만주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중국인 관리와 지주들에게 착취와 박해를 당해 고통을 호소함에 따라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구성했는데 이때 그는 재무부장이 되어 직접 만주를 방문하여 동포구제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간회의 활동과 그의 존재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제는 서서히 체포망을 좁혀 왔다. 결국 신간회는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핑계로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만다. 이에 뜻한 대로 국내에서는 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없음을 안 박동완은 해외망명을 계획하였다.
당시 하와이에서 목회하면서 민족운동을 벌이던 감리교 목사 민찬호, 임두화와 연락을 취하면서 망명을 계획, 마침내 1928년 8월 하와이로 나갈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와히아와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하면서 임두화 민찬호 목사 등과 손잡고 민족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1931년 하와이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잠시 귀국한 적이 있으며, 1934년에는 〈한인기독교보〉를 창간, 그 편집을 맡았다. 그는 특히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국내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호놀룰루 기독교회의 목사로 재직하면서 1933년에는 감리교회의 기본금을 위하여 작은 성의를 표하면서 17원 9전(미화 5달러)을 총리원으로 보내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외에 거주하면서도 한국 감리교회와 끊임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 교회, 언론, 민족운동의 바쁜 세월을 보내던 중 1941년 초 불의의 병을 얻어 그 해 2월 23일 이국 땅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국내에 있던 가족, 친지들은 그의 유해를 들여와 장례식을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부고조차 내지 못했고 한 달 후 쓸쓸하게 돌아온 유골은 3.1운동 동지 함태영 목사의 손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무궁화골\"이란 뜻을 가진 근곡(槿谷)이라는 호를 사용했고, 3.1운동 이후 한복만을 입으면서 조선이 독립하기까지는 바지 대님을 매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한 시각은 일본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시계는 항상 30분씩 늦추어 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