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무어(John Zachariah Ⅱ Moore, 1874. 1. 8~1963. 8. 6)


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문요한(文約翰)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3대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사이오대학을 거쳐 1903년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미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그 해 5월 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되었던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에서 무어(D.H. Moore) 감독에게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당시에는 신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안수받는 선교사가 많았다.

무어 선교사는 목사 안수를 받은 그 해 평양으로 파송되어 2년 전에 먼저 온 모리스(Charles D. Morris) 선교사의 협조자로서 관서지역 선교사업에 주력하였다. 1905년 귀국하여 로니(Alpha Roney) 양과 결혼하였고, 그 후 계속 미국에 머물면서 선교본부 해외선교사업을 도왔다. 1914년 부인과 사별한 후 다시 내한하여, 먼저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베네딕트(Ruth Benedict) 양과 재혼한 후 평양에서 지내면서 40평생을 관서지역을 위해 일하였다.

1887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다녀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평양의 선교사업이 시작된 것은 1893년 의사 홀(W.J. Hall)에 의해서였다. 홀은 서문통에 한옥을 구입하고 교육사업(광성학교)과 의료사업(평양기독병원)과 복음사업(남산현교회)을 시작했으나 1895년 병을 얻어 별세하였다. 그 후 노블(W.A. Noble) 선교사가 평양에 머물면서 평안북도 의주, 영변, 박천 등지와 평양, 진남포, 강서 그리고 황해도 사리원, 신계, 서흥, 곡상 등 넓은 지역을 순회하며 교육과 복음전파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1901년부터는 모리스 선교사가 노블 선교사의 후임으로 북한 선교사업을 담당하다가 1914년 무어 선교사가 다시 평양으로 임명되자 모리스 선교사는 평안북도만 담당한 후 영변으로 가서 머물게 되었다. 그때부터 1941년 일본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무어 선교사는 일생을 평안남도와 황해도지역을 담당하며 헌신하였다. 무어는 한국 민족 한 사람이라도 더 주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소명감에 시골길을 걸어서 다니기도 했고, 말을 타고 밤낮 없이 순회하기도 했다. 교세가 약한 교회에는 월급을 주어 교역자를 보내주었고, 교회당이 없는 교회에는 보조금을 주어 성전을 건축하게 했으며,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무어 선교사가 있던 지역의 의료기관은 처음부터 의료선교사들이 운영을 맡고 있어서 무어 선교사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육사업은 전문대학이 아니면 교회사업을 맡은 선교사들이 교육까지 담당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무어 선교사는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해주, 연백, 평양, 대동, 중화, 용강, 강서, 순천, 진남포 등지에 많은 초등학교를 설립했으며 학생들의 수업료 외에 부족한 학교 운영비도 거의 무어 선교사가 충당했다고 한다.

1893년 홀에 의해 설립된 광성학교는 1903년 무어 선교사가 2대 설립자로 취임하여 장소를 경창리로 이전하고 본관, 과학관, 체육관, 무도관, 강당 등을 건축했다. 1918년에는 일본 문부성의 인가를 얻어 광성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시설도 공립학교에 비해 우수하고, 자격도 고등보통학교의 허가를 얻어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광성고등보통학교는 관서지방에서 유일하게 우수한 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기독교계 홍현설 박사, 김용옥 박사, 윤성범 박사, 정일형 박사 등 인재를 양성했고 미술계, 정치계, 교육계, 법조계 등에서도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한편 1899년 5월 미감리회 제15회 한국선교회에서 결의를 얻어 노블(W.A. Noble) 부인과 폴웰(E.D. Follwell) 의사가 시작한 평양 정의여학교도 설립자 겸 이사장을 맡은 무어 선교사의 노력으로 1920년 문부성에서 여자고등보통학교 인가를 얻어 평양에 유일한 명문사학이 되었다.

또한 무어 선교사는 1916년 당시 여선교사업으로 평양에 주재해 있는 로빈스(H.B. Robins) 선교사로 하여금 여자성경학교의 교수가 되어 남산현교회 주일학교 교실에서 20여 명의 여학생을 모아 가르치게 했다. 그것이 북한지역 여교역자 양성기관인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의 시작이었고 무어 선교사 자신은 설립자가 되어 수옥리에 독자적인 교사(校舍)와 기숙사를 짓도록 협조해 주었다. 그리하여 설립부터 1945년 8.15해방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북한지역의 유치원 보모, 초등학교 교사와 교회 여전도사로 일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전문학교와 대학으로 진학케 하여 전국 여성계의 지도자도 양성하게 하였다.

무어 선교사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감리교 교역자의 수가 늘어가는 교회의 수를 따르지 못함을 생각하고, 자신의 한국 선교 35주년 기념사업으로 1938년 3월 평양에 신학교육기관인 요한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44년 폐교를 당했고 졸업생은 1백여 명 정도밖에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리인, 강용직, 김성렬, 강성원 등 여러 사람이 8.15 이후 교역자가 부족한 북한에서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기다 순교하기도 하였다.

무어 선교사는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되기까지 근 40년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관서지역에 1백 60여 교회와 30여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많은 이들에게 복음과 지식을 전하였다. 1925년 일본 정부의 표창을 받았고, 그가 이 땅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마운트 유니온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전도, 교육사업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표창했다.

1963년 8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하자 그 해 12월 15일 한국에서는 광성고등학교 동문과 요한학교 동문들이 서울 광림교회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다. 그의 부인이 1968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그 다음해 1월에 이환신 이윤영 윤창덕 이봉구 윤춘병 등 수십 명의 요한학교와 광성학교 동문들이 시온교회에 모여 애도하는 예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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