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매영숙(梅英淑, 1909. 2. 20~1985. 8. 3)


사회사업가

1932년 5월 남편 장세환(張世煥)과 함께 아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여선교회 활동에 열심을 내었다. 1932년 10월 1일 학습을 받고 그 해 12월 25일 엄재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잦은 목회자의 변동과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탄압이 심한 상황에서도 아현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지켜나갔다. 6.25가 발발하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한 후 보수동에 집을 얻어 박승호 전도사 가족을 비롯한 아현교회 교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전쟁 후 1954년 당회에서 여선교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부산 피난 시절 남편 장세환은 신영사라는 건설회사를 설립 운영했는데, 1953년 말 서울로 올라와 끊어진 한강철교 복구공사 및 정부 발주 철도, 도로공사의 상당부분을 맡았다. 본래 베풀기 좋아했던 장세환 매영숙 부부는 이런 사업으로 얻은 이익을 교회 개척과 목회 지원에 아낌없이 내어놓았고, 가족이 살던 80평 집을 교회에 헌납하여 1954년 아현교회의 지교회(支敎會)인 북성교회를 개척했다. 1969년 5월 교회 창립 15주년을 맞아 새 예배당을 건축 봉헌한 북성교회는 매영숙의 공로를 기려 새 예배당을 \"매영숙 장로 기념예배당\"으로 명명하였다. 이후로도 아현교회 개척 교회와 선교사업 및 장학사업의 재정적 후원자로서 재물과 시간을 아끼지 않은 헌신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 두 번에 걸친 성전 건축 때마다 건축비의 큰 몫을 감당했다. 개인적으로 애지원이라는 고아원을 경영했고, 농촌 목회자와 가난한 신학생들을 지원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1958년 2월 서울북지방회에서 장로시험에 우등으로 합격하여 장로 후보로 추천받아 1958년 6월 1일 장로로 취임했다. 매영숙 부부는 1966년 연회 때 은퇴 교역자를 위한 은퇴 찬하식을 베풀고 기념품과 은급비를 선물하는 선례를 남겼다. 또한 1966년 8월부터 제주지방에 있는 27명의 교역자에게 매월 1천 원씩 보내어 생활을 도왔고, 자립 교회가 되도록 각 교회에 12만 원을 보냈다. 1969년 환갑 때는 잔치를 사양하고 그 비용으로 피아노를 구입하여 아현교회와 북성교회에 각각 바쳤다. 1970년에는 동부연회 성동지방 갈매리교회가 예배드릴 건물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1만 원을 헌금하여 천막을 구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사회활동으로 1970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회로부터 제7대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수상했다. 용신봉사상은 수원 샘골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순직한 최용신 전도사를 기려 제정한 상으로 여성 사회봉사 활동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다. 1985년 4월 5일에는 인천에서 개최된 한국 감리교 선교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에서 한국 교회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1985년 별세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가진 후 경기도 광주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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