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남경순(南璟淳, 1904. 9. 27~1990. 4. 22)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하였다. 간성읍보통학교와 원산 루씨여학교를 졸업한 후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同志社)대학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귀국 후 선교사 쿠퍼(Cooper)와 함께 원산에서 평해까지 순회전도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아이들을 모아 공부시키다가 나중에는 쿠퍼와 함께 보혜성경학교를 재정비하고 발전시켜 전도부인을 양성하였다. 보혜성경학교는 남감리교 여선교사 노울즈(Mary Knowles)가 6칸짜리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하여 \"반렬방\"으로 시작하였는데 그 후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 총무인 콥(Alice Cobb)이 내한하여 원산을 방문하였을 때 원산 주재 선교사들은 원산에 여성들을 위한 성경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콥 총무는 귀국 후 개인적인 활동으로 모은 기금 2천 달러를 희사하였다. 이로써 1909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를 \"엘리스콥성경학원\"이라고 불렀다. 학생 수의 증가와 여성사업을 이 학교를 중심으로 실시하므로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어 1926년 9월에는 종합적인 여성사업기관인 보혜여자관이 설립되고, 성경학원은 보혜여자성경학교로 개편됨과 함께 보혜여자관의 연관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보혜여자성경학교는 초기에 노울즈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여목사인 쿠퍼와 함께 전도 일을 맡아본 남경순에 의해 체계가 정비되고 발전되었다.
초기의 학생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은 미망인들로 35세에서 60세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들은 거의 기초교육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전통적 관습대로 자신의 이름도 가지지 못한 부인들이었다. 학교에서는 우선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대개 \"마리아\", \"수산나\", \"한나\", \"사라\" 등 성서적인 것들이었다. 더불어 한글교육을 시키는 등 기초적인 지식을 교수하였다. 2년 동안 보혜여자성경학교에서 활동한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였다.
1934년에는 동만주 순회선교사로 파송되어 용정에 머물면서 순회전도를 하여 사람들에게 독립의지를 심어주었고, 1937년에는 동만지방 여선교회 총무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원산에서 보혜여자관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지휘했던 쿠퍼가 38선으로 인해 원산으로 복귀하지 못하자 충정로에 있던 옛 여자신학교 건물에서 \"보혜성경학원\"을 개설하여 여전도사 양성사업을 착수하는데 남경순 역시 이곳에 교사로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6.25전쟁과 함께 학교의 수업은 중단되었고 이로써 일제 암흑기에 한국 교회를 지킬 수많은 전도부인을 양성하고 여성계몽의 선봉에 선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하여 크게 공헌했던 보혜여자성경학교는 그 자취를 잃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감리교 여선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여선교회를 이끌었고, 1947년 각 교파 여성지도자들이 모여 \"세계연합기도일\" 행사를 재개시키는 데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둘로 나뉘었던 감리교회의 재건 측, 복흥 측이 1949년 4월 1일 합동을 선언하고 4월 26일 통합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남경순을 위시한 9명의 여선교회 대표들이 선교주일을 안식주일로 바꿔 지키고 그날에 수금한 것을 안식관을 위하여 쓰도록 건의안을 제출하여 통합연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런데 이 통합연회에서 느닷없이 여선교회 명칭이 \"부녀회\"로 바뀌었고 대회도 폐지되었다. 이는 총리원에서 \"부녀국\"이라는 산하기관을 만들고 그에 따라 \"부녀회\"를 둠으로써 여선교회를 총리원이 간섭하고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선교회원들이 자기 본래 이름을 되찾고자 노력하여 1953년 대전에서 열린 감리교 특별총회에서 다시 \"여선교회\"로 명칭을 환원시켰다. 이와 함께 새로운 임원진도 구성하였다. 이 대전 대회는 처음으로 유급간사제도를 채택하였는데 남경순은 전도부장에 유급간사로 선임되었다. 1971년 8월에는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감리교회는 1970년에 대대적인 해외선교기금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당시 선교사업 위원장이던 그녀는 1972년 \"여선교회 창립 70주년\"을 기해 보다 적극적인 해외선교사업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는 여선교회 자문위원으로 헌신하였다. 1976년에 여선교회회관 건립 사업을 시작하였고 회관 후보지 물색을 위한 특별위원으로 남경순 외 7인이 선정되어 지금의 한남동 여선교회관이 있기까지 건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여선교회에서 비중 있고도 중요한 사업인 안식관은 정릉에 새 관사를 짓기로 하여 1956년 건축하고 1957년 7월 전국대회 기간 중에 봉헌식을 가졌다. 안식관 운영을 전담할 이사회가 구성되었는데 남경순은 사무 부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69년에 신축된 정릉안식관 별관에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6대 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전도부장(1953~1956, 1966~1973)과 사회사업부장(1963~1965)을 역임하였고 서울북지방 총무(1951~1961), 서울서지방 총무(1963~1973), 경서지방 총무(1974)로 활동하는 등 한국 감리교회 여선교회 역사와 함께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