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현호(金顯鎬, 1884. 9. 3~1965. 9. 18)


감리사. 호는 금산(錦山)


경기도 부천군 덕적도에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25세 때 기독교인이 되었다. 교육에 뜻을 두어 향리에 사립 명신학교를 설립, 운영하였고 덕적면장을 겸임하면서 32세 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21년 10월 2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4년 강화읍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5년(41세)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 수료하면서 그 해에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내리교회에 부임하였다.


내리교회에 부임하여서는 청년 시절에 뜻을 두었던 대로 교육에 주력하는 목회를 하여 주일학교와 성경연구반을 활성화시켰다. 특히 엡윗청년회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이를 확장, 개편하여 청년들에게 일을 맡기고 부흥케 하였다. 청년회는 종교부를 비롯하여 선전, 사회, 운동, 음악, 절제부 등을 두어 월중행사로 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전도회, 절제운동 등을 개최하여 교회에서 청년들의 광장을 넓혀 청소년 교육 분야의 내실을 기하였다.


1928년 흉년과 경제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교회 부채를 청산하고 낙후된 교회당을 대폭 수리하여 참신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렇게 구조적인 내실을 기할 뿐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크게 부흥하였다.


김현호 목사는 내리교회에 재임하는 중에 내리교회 소속 학교인 영화학교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당시(1930) 일본인 부윤(府尹, 현 시장)인 나가이(永井)가 학교의 영세성과 운영난 등을 이유로 그 운영권을 시청에 양도케 하여 인천 제2보통학교를 설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음으로 양으로 학교를 괴롭혀 왔다. 이에 김현호 목사는 학교를 내\"외적으로 정비하여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즉각 학교운영이사회를 강화, 조직하고 교회가 직접 학교유지비를 담당하면서,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인근 가옥 세 동을 매입하여 운동장을 확장하는 한편 학제를 6년제로 승격 개편하여 명실상부한 학교체제를 갖추었다. 이와 같이 교회와 학교가 일치하여 안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밖으로는 인천부윤의 부당한 압력과 탄압을 신문지상에 공개하여 사회여론에 호소하면서 일년간을 싸웠다. 그 결과 교회가 위기에 처한 학교를 구할 수 있었고, 사회에 교회의 저력을 과시하면서 은연중에 잠재된 민족적인 역량을 나타낼 수 있었다. 김현호 목사의 목회 특징은 교육목회에 역점을 두면서 특히 청년들을 지도 훈련함으로 교회를 항상 젊게 하는 활력소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기독신보〉에 \"조선감리교회 조직\"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행정적인 통합이나 재정적인 통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통일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양 교회의 통일을 위한 위원들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먼저 받고 합동의 뜻을 전하고 각 교회마다 일주일 동안 같은 목적을 가지고 기도함으로 정신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함을 말하였다. 더 나아가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조선적 감리교회를 조직하려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정신으로 즉, 그리스도의 화평한 나라를 조선 땅 위에 건설하여 우리 민족으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내 것 네 것 없는 재정적 하나를 먼저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931년 고향인 덕적교회에 부임하였으며, 1937년 이후로 인천지방 순회목사로 시무하였다. 이후 인천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고 인천지방을 순회하며 목회하다가 1939년 은퇴하여 고향인 덕적도 덕적교회 등에서 시무하던 중 고향에서 별세하였다.


-논문:\"조선감리교회 조직에 대한 제가의 고견\", 〈기독신보〉, 193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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