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찬흥(金燦興, 1875~?)
1909년 연회 학습을 받고 전도를 시작하여 황해도 봉산(鳳山)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10년 영변(寧邊)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장락도, 안창호, 이익모, 오기선, 김흥순 등과 함께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조선그리스도인회보〉에 게재된 이들 신학생 3년급 시험점수를 보면 학업에도 모범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1911년 12월 20일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25일에는 북감리회 연회에서 손정도, 오기선, 안창호, 김광식 등과 함께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3년 6월 10일에 장로목사 안수와 함께 평남 진남포교회로 부임하였으며 진남포 비석동교회에서 개최된 부인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한다. 1917년 평양교회에서 목회하다가 3.1운동을 맞아, 평양지방 감리교 목회자 중에서 최연장자로서 가장 앞장서서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예배 때에는 감리교회 목회자를 대표하여 사회를 맡았다. 이날의 예배는 예배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나 사실은 독립선언식이었기에 예배가 끝난 후 참석한 교인과 학생 2천 명이 시위를 시작함으로 평양의 3.1운동의 시발점을 이루었다.
3.1운동 이후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잠시 남산현교회의 담임자로 시무하였다. 그 후 1921년 미감리회 연회에서 인천지방 감리사로 파송되어 8년간 시무하였으며 1925년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이사로 선임되어 교육사업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남.북감리교회의 통합 문제가 토의되기 시작한 1924년 이후 1926년에 조선에 있는 남.북감리교회가 통합할 방침을 연구키로 하고 조선남북감리교회통합방침연구연합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을 각각 5인씩 택하였는데 이에 미감리교회 조선연회 대표로 노블, 윌리엄즈, 김종우, 오기선과 함께 선출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조선에 있는 두 매년회를 합하여 한 연회를 만들 것과 조선에 있는 남.북감리교회의 모든 사업을 합동 연결하여 감리교회는 일치한 행동을 취할 것 등\"의 실행 방침을 두 조선연회에 제의했으며, 이 제의에 따라 1927년 미감리회 조선 목사 대표 3인으로 신홍식, 송득호 목사와 함께 선출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시련을 당하고 침체 분위기 속에 있었지만 남.북감리교회는 내적으로 성숙해 가고 있었다. 특히 북감리교회는 1929년까지 선교사들과 한인 교회 지도자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각 지방의 감리사직에 일제히 조선인 교역자들이 임명되었다. 이것은 조선인인 교역자들의 지도력이 성장하여 실제 선교사업의 현장이 조선인들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에는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자치하는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김찬흥은 그 형성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29년 충남 공주교회로 부임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1931년 11월 30일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1931년 공주지방 감리사로 임명되었고, 그 해 제1회 연합연회에서 수원 종로교회에 파송되어 1934년까지 시무하였다. 종로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그는 오래 전부터 추진되어 오던 교회 건축을 이루었으며, 건축 이후로 주일학교 활동이 매우 활발해져 전국적으로 부흥하던 주일학교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34년에는 교역 25주년 기념식과 함께 회갑 축하식을 종로교회에서 거행하였는데 〈감리회보〉에 실린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혼신을 다하여 모범적으로 목회하던 김찬흥 목사의 일생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교역 25주년과 회갑 기념예배를 보도한 〈감리회보〉의 기사다.
\"수원교회 김찬흥 목사의 교역 25주년 기념식과 회갑축하를 지난 4월 3일 오후 2시에 동교회에서 거행한 것은 인사에 기재되었거니와 당일은 본교회 교우와 인천 경성 등지에서 온 무려 수백명의 회중이 만당하여 자못 성황을 이루었다는데 씨의 헌신이래 동역자되시는 장락도, 이익모 제씨와 총리원에서 참석한 류형기 목사의 감격에 넘치는 축사가 있었고 각지에서 온 축전축문 낭독과 예물 진정이 있었고 김목사의 뜻깊은 답사로 식을 마치고 일동은 목사 자택에서 준비한 축연으로 자리를 옮기어 주객이 환담의 꽃이 피었다. 씨는 봉산교회에 처음 파송받기를 시작하여 영변, 평양, 진남포, 공주, 인천, 수원 등지에서 사역하는 중 가는 곳마다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연기(年期)는 비록 회갑이 되고 교직 연한이 임박하였으나 아직도 원기 왕성하여 이 앞으로도 난경에 속한 우리 교회는 씨와 같은 헌신적 열성적 사역자의 많은 활동을 기대한다더라.\"(〈감리회보〉, 1934. 5, 7쪽)
그리고 그 해 휴직하였고 이어 1935년 4월 은퇴하였다.
그의 부인 역시 남편과 함께 교회의 일에 충성하였다. \"김찬흥씨 부인 송건신 씨는 주를 독실히 믿고 쥬를 사랑하고 불쌍한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여 전도를 힘써하며 주일이면 30리나 되는 교회 일을 열심으로 어려움을 낙으로 여기고 왕래하고 성내 교회 일을 겸하여 보다가 뜻밖에 병을 얻었다.\" 김찬흥 목사가 영변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부인이 병을 얻은 것이다. 부인은 광혜원에서 병을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기력이 다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오히려 그는 신앙으로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기력이 쇠진하여 세상을 이별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평안한 모양으로 말하기를 \"아무 걱정이 없는 것은 내 주께서 돌아보심으로 걱정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1911년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녀 김기연은 배재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내한하였던 레시 선교사와 함께 종교교육사업을 하다가 1931년 총리원 간사로 일하였으며 한국 소년 척후대 운동에 공헌하였다. 또한 그의 부인은 해방 후 부산에서 오랫동안 윤락여성을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