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종필(金鍾弼, 1896. 5. 20∼1978. 5. 17)
경기도 시흥군 안산읍에서 농부인 김용배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1922년 개성공립간이상업학교와 1925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1928년 3월 일본 고베 관서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로 파송받았으며 1930년 9월 28일 목사 안수를 받고 1934년까지 평양중앙교회,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진남포교회, 1935년부터 1942년까지 개성북부교회, 1942년부터 1943년까지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각각 담임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한국인학교 교장으로 교포교육에 힘쓰다가 1946년 5월 교포 7백여 명을 인솔해서 목포로 귀국하였다. 목포에서 문태중학교 교장으로 잠시 재임한 후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교목 겸 교수로 전임하여 1958년까지 근무했다. 이 기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1955년 오하이오 주 북대학을 졸업하였다. 1958년 10월 4일 감리교 제8회 총회에서 32회의 투표 끝에 제8대 감독으로 선출되어 당시 호헌파와 총리원파로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는 데 힘쓴 결과 1959년 3월 교회통합의 결실을 이루었다. 감독 재임 기간 중 4·19의거에 의한 교계 정화 문제 및 ‘박이남 공금유용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62년 7월 감독 임기를 마치고 이듬해 3월 인천 내리교회로 부임하여 화재로 불타버린 예배당을 다시 건축 봉헌하는 등 교회 부흥에 힘썼다. 1967년 4월 8일 중부연회에서 은퇴하면서 그의 40년 교역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매월 마지막 주일에는 계속해서 내리교회 강단에 서서 고전적이면서도 감동 깊은 메시지를 전했다. 1977년 10월 30일 어느 때처럼 내리교회에서 “무관심”(눅 10:25∼37)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말이 끊기고 주저앉듯이 쓰러졌다. 뇌일혈이었고, 이후 병석에 누운 지 7개월 동안 말 한마디 못한 채 투병하다가 1978년 5월 17일,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