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종우(金鍾宇, 1883. 9. 21∼1940. 9. 17)


감독. 호 천곡(泉谷)

경기도 강화군 위량면 홍천동 천곡마을에서 유학자 김철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도학자 칭호를 받던 조부(김용하)에게 정통 유학과 유교교육을 받았다. 1901년 8월 조부가 기독교에 감화를 받아 개종하자 그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그 해 9월 스크랜턴(W.B. Scranton)에게 세례를 받고 11월에 속장이 되었다. 1907년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학업과 함께 전도사로 파송받아 활동하다가 1911년 고등과 제3회로 졸업했다. 배재학당 대학부에 진학한 그는 중도에 포기하고 당시 젊은이들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친구와 함께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서 펼치려던 그의 꿈은 마적떼의 습격으로 친구가 절명했고 그는 간신히 혼자 돌아옴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에 돌아오니 세 곳에서 일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서양인 금광에서 월급 70원에 오라는 것과 정부 관청에서 판임관으로 오라는 것뿐 아니라 정동제일교회 최병헌 목사도 전도사로 오라고 연락해 왔다. 전도사 월급은 10원이었다. 고민 끝에 “어찌 나 홀로 선조의 뜻을 버리고 물욕을 위하여 살까보냐”고 결심하고 목회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마음의 번민은 계속되었다. 결국 김종우는 마지막 결단을 위해 서대문밖 진관사로 가서 절 뒤편 절벽 꼭대기에 올라 기도하던 중 “인생의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는 하늘의 응답을 받았다.

“일헤되든 날 새벽 긔도시에는 겻헤서 누가 말하여 주는 것갓치 ‘이 어리석은 자식아! 엇지 그리 미련하냐! 네게 뎨일 귀한 것이 무엇인줄 아느냐? 네게 뎨일 귀한 것이 무엇이며 인생의 뎨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텬하를 주어도 박굴 수 업는 것은 너의 생명이 아니냐?’ 하는 소리가 들엿다. 엇지도 하엿든지 오날지도 그 말이 귀에 졍졍하야 이즐내야 이즐 수가 업다.

나는 그 쟈리에셔 감격한 눈물을 렷다. 그부터 七十원의 금덩어리는 눈압헤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하님이 주시는 영생 복이 보일 이엿다. 나는 나의 긔도가 드르신 바됨을 환연히 닷고 눈물을 씻고 니러나 다시금 겅충겅충 며 깃버하엿다. 나는 그 자리로부터 나의 몸을 쥬 산졔사로 드리기를(롬 12:1) 쟉뎡하고 내 압길에 무릇 무슨 쟝애와 시험이 잇슬지라도 하나님이 가라쳐주신 그 생명의 길을 바리지 안코 죵신토록 밟어나가기를 작뎡하엿다.”(《승리의 생활》, 131∼132쪽)

김종우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본격적인 신학훈련을 위해 피어선성경학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1913년부터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갖은 노력에도 설교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이 세상의 학식과 웅변술을 의지하여 가지고는 천국사업을 할 수 없고 오직 신의 능력을 얻은 후에야 주의 대언자 노릇을 할 수 있음을 깨닫고” 백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서울 남산에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봐라. 너는 나를 봐라! 나는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하다. 네 마음이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하냐”는 음성을 듣고 눈물이 쏟아지며 그때까지 의인이라고 자처하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성신의 영감을 받았다.

“내가 평생에 잇지 못할 날은 1914년 11월 21일 쥬일밤 열두시니 이날은 예수셔 형샹으로 나타나사 나의 올흔손을 잡으시고 약조하신 날이오 내가 시의 교훈을 밧은 가쟝 대한 시간이 되엿다. 그는 육신의 생각이 아조 치고 령혼이 무시로 쥬로 더부러 교통하야 무한한 깃븜과 즐거옴이 충만하던 엿다. 그부터 능력을 어더 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에 1년 동안에 10여차 부흥회를 인도하엿고 부흥의 결과로 새로 거듭남을 밧은 사람의 슈효가 수쳔에 달하엿다.”(《승리의 생활》, 134쪽)

다음해부터 각 교회의 요청에 따라 연간 50차례의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1915년 성경학원을 졸업한 그는 계속해서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김창준, 손정도 등과 함께 1917년 졸업했다.

영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16년 3월 12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은 후 동대문교회 담임(1917∼1919)을 시작으로 1919년부터 1927년까지 8년 동안 정동제일교회 담임, 1927년에서 1929년까지는 경성지방 감리사,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상동교회,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수표교교회,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정동제일교회 등 서울의 주요 교회를 담임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켰다.

1938년 10월 12일에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차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총회에서는 양주삼 총리사의 뒤를 이을 감독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후보자가 8명이 나와 이틀간 21회에 걸친 투표를 하였는데도 재적회원 3분의 2를 넘는 당선자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셋째 날, 이날은 마침 총회 기간 중에 별세한 벙커 부인(A. E. Bunker) 장례식이 있어 총회원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인 11시 30분에 총회가 재개되었다. 그때 조그만 해프닝이 벌어졌고 감독 선거의 판도가 바뀌었다. 당시 총회에 참석했던 아펜젤러(H.D. Appenzeller)의 증언이다.

“총대들은 마루바닥에 앉았다. 모두들 기력이 쇠진해서 피곤해 있었고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때 열린 창문으로 해서 비둘기 한 마리가 투표장 안으로 날아 들어와서는 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 그러더니 그 비둘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상에 잠겨 있는 김종우 목사 바로 앞으로 내려앉았다. 김 목사가 조용히 손을 펴 내밀자 비둘기는 다시 날아 올라 창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벙커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심히 우울해 있던 상태에서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자 투표장 분위기가 바뀌어 김종우 목사에게 표가 몰리기 시작해 쉽사리 3분의 2 다수표를 얻을 수 있었다.”(The Korea Mission Field, Nov. 1939, p.241)

비둘기가 총회장 안으로 날아든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과연 그 후 실시된 22차 투표에서 김종우 목사는 37표란 절대다수를 얻었고, 23차 투표에서는 42표를 얻어 마침내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날 총회의 투표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 비둘기의 출현을 하나님의 계시 혹은 현현으로 이해했던 것인데, 이는 김종우 목사가 평소 기도생활에 전념하는 ‘영적인 목회자’로 인식되고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감독이 된 시기는 신사참배 문제 등으로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던 시기여서 일제에 저항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나마 감독직도 1년밖에 수행하지 못했다. 1938년 8월 일제의 강요로 다른 교파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일본에 가서 단체로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갑자기 악성 패혈증에 결려 9월 17일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장례식은 1939년 9월 21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감리교회장’으로 치렀는데 전 총리사 양주삼 목사가 주례를 맡았다. 유해는 양주군 노해면 월계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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