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자경(金慈璟, 1917. 9. 9∼1999. 11. 9)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 김영환(金永煥)은 스무 살 되던 해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어머니 열쇠(烈釗)와 결혼하여 고향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이주, 어느 교회 뒷방에서 생활했다. 김영환은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공부하여 1년여 만에 약제사 허가를 받고 개성에 약방을 차렸다. 음악에 소질이 있던 부부는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음악을 맡았다. 어머니 열쇠는 여학교에 다니던 중 임신하여 김자경을 낳았다. 서울에 있던 시어머니가 개성으로 와서 동냥젖을 먹이며 어린 김자경을 키웠다.
개성에 있던 브래넌(L.C. Brannon, 夫羅萬) 선교사가 서울에 있는 신학교로 갈 것을 권유하여 김영환은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 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김자경은 이화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2학년 때인 1928년 1월 아버지가 신학교를 졸업하였고(제14회) 이에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춘천으로 이사했다. 몇 년 후 원산에 있던 브래넌 선교사를 도와 교회 일을 돌보기 위해 다시 원산으로 옮겼다.
김자경은 원산에서 루씨보통학교 6학년에 편입했고 이후 루씨여고에 진학하였다. 김자경은 여덟 살 때 선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여학교에 들어가서는 서양음악을 하려면 우리 음악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야금, 장고, 소리, 민요 등을 배웠다. 루씨여고 시절 운동을 잘하여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또한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성악독창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고, 재봉기술도 뛰어나서 수예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서 재주를 보였다. 대학 진학 때가 되자 재주가 많아 오히려 고민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마치지 못한 의학공부를 권유했고 그에 따라 동경여의전에 가려고 했으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화여전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각종 음악회에서 노래를 하는 등 성악에도 재능을 보였다. 학교에서도 피아노보다 성악공부를 하면 더 좋을 것 같으니 졸업을 1년 연장해서 성악공부를 하면 성악·피아노 두 과의 졸업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장학금을 받고 성악과로 전과하여 채선엽 교수에게 레슨을 받았고 1940년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졸업 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이화여고 교사로 봉직했다. 1941년 동경 빅터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같은 학교 미술담당 심형구 선생이 동경까지 찾아와 청혼을 했다. 1940년 11월 상처한 심 선생이었으나 정신대 문제 등으로 결혼을 허락했고, 1941년 10월 독창회를 마친 후 그 해 12월 26일 결혼했다.
해방되던 1945년부터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8년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한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에서 주인공 비올레타 역으로 열연했다. 1948년 8월 미국 줄리아드음대에 유학, 1950년 5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갖고 당시 미국 언론을 크게 장식했다. 한국 무용가 조택원에게 한국 춤을 배워 독창회 후 한국 춤을 보여줌으로 미국에서 호평을 받는 등 1백 회 넘게 공연하였다. 세계적인 테너 리처드 터커와 함께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에 있던 자식을 잃어버려 크게 상심, 신문방송을 통해 아이들을 찾는 광고를 냈다. 신문광고를 본 아이들이 부산에 있던 김활란을 찾아갔고, 1951년 2월 군용기를 통해 도미하여 김자경과 재회할 수 있었다.
미국생활 10년 만인 1958년 귀국하여 1983년까지 이화여대 성악과 교수로 봉직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하여 30여 년 간 정기 공연 56회, 지방 및 소극장 공연 6백여 회 등을 공연하며 한국 오페라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1965년 이탈리아 SANTA CECILIA 음악학교 성악과를 수료했고, 1994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악과에서 수학했다.
1991년 사재 17억 원을 털어 김자경오페라단을 사단법인으로 바꾸고, 신촌 자택을 개조해 오페라연구원을 열었다. 한국 오페라사에 남긴 뛰어난 업적 못지 않게 수상 경력도 아주 화려해 대한민국예술원상(1974),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1974), 국민훈장 석류장(1983), 세종문화상(1987), 프랑스 문화예술훈장(1992) 등을 수상했다.
1990년 남편이 별세한 지 28년 되던 해, 새벽에 일어나면 혼자라는 외로움에 힘겨워하던 김자경은 동쪽 창을 향해 앉아서 다음과 같이 울며 기도했다고 한다. “주여, 나를 이제는 데려가 주소서. 더는 힘이 없습니다. 의욕이 없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 동쪽 하늘의 태양이 가슴에 내리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마음속에서 어떤 외침이 들렸다고 한다. “자경아, 너는 28년 전에 남편과 죽었고 새로운 네가 그 해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 나이 이제 스물 여덟 살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그 순간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그날 밤 텔레비전에 출연할 일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첫 물음으로 김자경의 올해 연세가 얼마인지를 묻자, “올해 나이 스물 여덟”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때부터 김자경은 스물 여덟의 젊음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대신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했고, 명예권사로 있으며 아들 내외와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등 신앙생활에도 열심이었다. 1999년 11월 9일 당뇨 합병증으로 별세,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가족묘지에 묻혔다. 유족으로는 심용식(사업), 영혜(미국 오하이오 주 애쉴랜드 교수), 홍(사업), 현식(사업) 등 3남 1녀를 두고 있다.
저서:《눈으로 듣는 삶의 노래》, 도서출판 삶과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