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인영(金仁泳, 1893. 5. 1∼1953. 6. 11)


신학자

서울 사직동에서 출생. 김인영은 1896년 세례를 받았으며 1913년 개성 한영서원 중학과를 졸업하고, 1915년 피어선성경학원을 수료하였다. 1918년 12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에모리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1928년 귀국해서 감리교 협성신학교 성서학 교수로 취임했으며 〈신학세계〉(神學世界) 편집을 맡기도 했다. 1932년부터 9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겸 교목으로 재직하였다. 1913년 남감리교에서 전도생활을 시작으로 목회를 했던 그는 1917년 경성지방 동구역장, 1918년 석교교회 전도사, 1922년 9월 집사목사 안수를, 1924년 9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1년 3월 조선감리회 특별총회에서 연회가 해산되고 폐쇄되었던 감리교 협성신학교가 다시 개교될 때 교장으로 추대되어 일제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했다. 또한 정춘수 목사를 중심으로 한 혁신교단 간부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아 남산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재개하였다. 1946년 6월 정동제일교회 담임자로 초빙되어 시무하면서 1947년부터는 서울남지방 감리사의 직책까지 겸임하여 해방 후의 교회 혼란을 수습하는 데 전력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교회의 기틀이 자리잡게 될 때 한국전쟁이 터져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공산군 정치보위부에 1주일간 구류되는 등 3개월간 공산치하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매주일 예배를 드렸다. 9·28수복 후 ‘재경파’(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와 ‘도강파’(피난 나갔던 사람)의 대립으로 아들이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하자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1952년 초에 단독 상경하여 목회를 시작했다. 1952년 7월 서독 빌링겐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기독교연합회(WCC)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회의 선교적 책임”에 대한 연구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와 보고 강연을 하는 등 분주하게 활동하다가 1953년 6월 고혈압으로 쓰러져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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