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의기(金宜基, 1959. 4. 20∼1980. 5. 30)
경북 영주군 용암리에서 경찰 공무원이었던 부친 김억과 모친 권채봉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영주 중부국민학교(1970), 배명중학교(1973), 배명고등학교(1976)를 졸업하고, 1976년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에 입학하였다. 1977년부터 농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79년 8월부터는 서강대학교 근대사 모임을 지도하였다. 대학 입학 이후 형제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0년 감리교청년전국연합회 농촌선교위원장과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농촌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그는 농민처럼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며 수수한 차림에 검은 고무신을 즐겨 신고 다녔다.
한편 김의기는 유네스코학생회(KUSA) 등의 활동으로 경찰들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1980년 5월 18일 전국적인 비상계엄령 선포와 함께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5월 17일부터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중앙일보사에 근무하던 누나 김주숙에게만 전화로 연락하여, “나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과 부모님 안부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광주민주항쟁 소식을 접한 그는 광주로 내려가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볼 때 그가 목격한 동족 살인의 민족적 비극을 알리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 광주민주항쟁과 관련된 계엄군의 왜곡된 발표를 폭로하면서, 그곳의 참상을 직접 서울 시민에게 알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980년 5월 30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던 정기 금요기도회를 시위 날로 잡았으나, 그곳은 자주 시위가 있던 곳인데다 그날은 시위를 예상하여 일방 통행마저 금지시킬 만큼 경계가 삼엄했던 가운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요기도회가 취소되고 말았다. 이에 혼자라도 시위를 결행키로 한 그는 12시경 회관에 들어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손수 타이프해서 인쇄했다. 여기까지는 확인된 사실이나, 이후 그가 오후 5시경 6층의 폭 1미터 베란다를 건너서 창문 밖으로 투신할 당시의 정황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 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 유신 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고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 숫자와 사이비 경제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들을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것인가의.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의.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 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1980년 5월 30일 오후 4시 35분, 김의기)
그의 영결예배는 6월 2일 김동완 목사의 집례로 거행되었고, 시신은 파주 금촌공원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광주 망월동으로 이장되었다. 1990년 2월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이 주어졌고, 1991년 5월 18일에는 5·18광주민주항쟁유족회에서 ‘5월 시민상’을 수여했다. 또 감리교청년회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감리교청년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7년 6월 1일 형제교회에서 ‘김의기 열사’ 동판 제막식을 가졌다.
그의 누이 김주숙 사모는 “막내 의기가 방학 때마다 농촌봉사활동을 떠나더니 어느 날 목회자가 되어 농촌목회를 하고 싶다며 끈질기게 가족들을 설득했다”고 회상하면서, “동생의 장례를 교회장으로 치른 후 가족 모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의기가 좋아했던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보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어머니 권채봉 여사는 형제교회를 다니면서 새롭게 거듭났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민가협과 유가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김주숙 사모는 ‘의기가 만난 하나님을 위해 농촌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현재 남편 박철 목사와 함께 강화도 교동섬의 지석교회를 섬기고 있다.
끝으로 그가 남긴 일기(1978. 12. 8) 한 토막을 살펴본다.
“이 밤 다시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기도 시작합니다. …… 우리 형제 농민들 버리지 마시옵고 …… 억압받고 고통받는 그들을 당신의 따뜻하신 손으로 어루만져 주소서. 당신의 그 크신 힘과 영광을 우리 형제 농민들에게 보여주시어 그들이 힘을 잃지 아니하게 당신께서 붙들어주소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당신의 모습이 깨뜨려져가고 있는 우리 형제 농민들에게 빛이며 진리이신 당신께서 밝음을 주소서. …… 당신의 뜻에 따라 행하기로 작정한 여러 형제들에게는 당신께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그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게 되더라도 당신과 함께 그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