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응태(金應泰, 1890∼1971. 5. 2)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그는 장진학교를 졸업하고 보흥학교에서도 공부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의 기독교청년회관 내 삼류(三留)의숙중학과와 국민중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수원 삼일학교와 논산 진광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교역자로 견습을 받고 1921년 10월 2일 집사목사로, 1925년 6월 21일에는 장로목사로 안수받았다. 1919년 충북 음성교회, 1920년 진천교회, 1922년에는 만주 길림, 1923년 하얼빈에 파송되어 시무했다.
1925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동대문교회를 담임했다(1926∼1931). 1931년 일본에 파송되어 도쿄에서 시무하다가 1934년 공주에서 순회목회, 1937년 대전에서 목회를 했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인천 내리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41년 창영교회로 옮겼다. 1941년 3월 혁신안이 채택되고 연회 해산 뒤 조직된 ‘기독교조선감리교단’(통리자:정춘수)에서 경기남교구장을 맡았고,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조직될 때는 전도국장으로 선임되었으며, 해방 직전 조직된 ‘조선기독교단’에서도 부통리자로 임명되어 일제의 종교정책에 협력했다.
해방 후에는 인천의 창영교회, 화도교회, 숭의교회와 인천성경학교에서 각각 시무했다. 1954년 3월 감리교 제3회 총회에서 류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재선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분열하여 ‘호헌파’를 형성하였다. 호헌파는 그 동안 교권 세력에 의해 소외되어 온 남한 출신, 특히 충청도 출신의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추태”를 “그대로 좌시 묵과”할 수 없어 ‘호헌’(護憲)을 주장한 것이다. 김응태 목사는 호헌파가 1955년 3월 별도로 조직한 총회에서 감독으로 추대되어 1959년 다시 감리교가 하나로 통합되기까지 호헌파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김응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감독 취임 소감을 발표하여 호헌총회의 영속성을 명시하였다.
“서로 평화를 노력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조직 안에서 서로 불편한 마음으로 싸우느니보다는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 오히려 불행을 적게 하는 것이 되리라고 믿어 부득이 새로이 총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미 별개의 조직으로 나누어진 이상 피차간에 논쟁이 없이 지나기를 바라며 서로 상대편을 축복하는 중에서 지나기를 희망한다”
1959년 은퇴하여 인천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며 율목교회를 돕다가 1971년 별세하여 율목교회에서 김용욱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갖고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수촌리 선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