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유순(金裕淳, 1882. 12. 17∼1950 ?)


감독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남. 1904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하와이에서 목회하는 아버지(김영식)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12년 미국 남가주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1913년 귀국해 정동제일교회, 강화 달오지교회, 흥천교회 등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신성한 은혜를 받게 하였으며 이후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활동하며 “여러 교회와 교인에게 복이” 되었다. 1917년 10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 마디슨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20년 귀국 후 다시 순회부흥목사로 활약하였다. 1921년부터는 평양 남산현교회를 담임하였고, 1923년 충남 홍성지방 감리사, 1926년 황해도 해주지방 감리사, 1929년 해주지방 감리사 겸 백천구역 담임, 1930년 천안지방 감리사 겸 천안읍교회 담임, 1935년 서울남지방 만리현교회를 각각 시무했다.

해방 후에는 1947년부터 북아현교회(현재의 아현교회)를 담임했으며 1949년에는 제9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49년 4월 복흥파와 재건파가 통합되어 ‘하나의 감리교회’가 될 때 중립에 선 화해론자였던 그가 감독으로 피선되어 다음과 같이 ‘주의 작은 종’ 된 자세로 새롭게 출발하는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천만 뜻밖에 금번 우리 총회에서 이 무능한 사람을 우리 교회의 감독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진실로 두렵고 떨립니다. …… 여러분의 종으로 피선된 이상에 여러분의 좋은 의견과 편달을 기쁘게 받을 작정입니다. 저 인력거꾼처럼 가자시는 길로만 가렵니다. 우편으로 가라시면 우편으로 좌편으로 가자시면 좌편으로 또 서라시면 서랴는 마음뿐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거룩하고 옳은 길인지 분명히 알고 꼭바로 지도하시옵시오. 그렇게 하여 주시면 교제는 주의 도우시는 대로 성심으로 쫓아 시행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조선감리회보>, 1949. 5. 15)

그러나 그는 감독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감독이 된 지 1년 남짓하여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이 공산당 통치 아래에 들어갈 뿐 아니라 감리교신학대학 안에 있던 총리원 사무실을 공산당에게 빼앗기자 교인들은 그에게 피난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 권면을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는 목회 원리로 다음과 같이 단호히 물리쳤다 한다.

“내가 감독이 된 것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내게 맡기신 것인줄 안다. 교회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는 못되나 주께서 나에게 감독의 중책을 맡기셨으니 어찌 이 양들을 이리 같은 공산당에게 맡기고 피하겠는가? 나는 양과 같이 생명을 버려 순교할 결심을 하였으니 다시는 권하지 말라.”(김춘배, 《한국기독교수난사화》, 성문학사, 1969, 211쪽)

감독의 위치에 있는 자로서 어찌 교인을 두고 피난가겠냐며 서울에 남았다가 결국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8월 23일 전국적으로 비밀리에 내린 교역자 납치 및 사살령에 의해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튿날 북으로 끌려간 후 생사를 알 수 없다. 김유순 목사는 “이름과 같이 유순하고 덕이 있는 목사요, 노할 줄 모르는” 인격자며, 겸손하게 양을 돌보는 목회자였다.

김유순 목사는 순행목사, 즉 부흥사로도 활동하였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는 미국 유학을 하고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부흥운동에 매진하였다. 유학 직후인 1913∼1917년과 1920∼1921년 동안에는 전국을 순회하며 교회 부흥의 역사에 참여하였다.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성신의 권능과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나타나 “눈물 흘리며 애통함으로 회개하는 자”와 “주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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