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영학(金永鶴, 1877. 2. 10∼1932. 12)


순교자

황해도 금천군 조포동에서 태어남. 1886년부터 1893년까지 한문을 공부했으며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시장에서 전도인에게 물을 퍼붓고 발로 차는 등 행패를 부렸는데, 그 전도인이 오히려 웃으면서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자 김영학은 감동받아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1907년 4월 세례를 받았으며, 입교한 지 1년 만에 권서인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9월 정식으로 남감리교 전도사 직첩을 받았으며 1914년 8월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15년 6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장로목사가 되었다.

평산구역장(1909∼1910)을 시작으로 금천구역장(1910∼1911), 장단구역장(1911∼1914), 철원구역장(1914∼1915)을 거쳐 서울 광희문교회(1915∼1917), 수표교교회(1917∼1918), 간성구역(1918∼1920)에서 목회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간성구역장으로 활동하며 양양교회 교인들을 비롯해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후 출감했다. 출옥 후 간성구역장으로 계속 시무하면서 상해 임시정부 산하 애국운동단체인 애국단 국내지부조직 ‘철원애국단’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10월 주동자 김상덕과 기독교 인사 박연서 전도사, 방기순 목사 등과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22년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나와 가평교회를 시무하며 남감리회의 선교백주년기념사업에 참여하다가 그 해 9월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사로 자원하여 파송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구역 관리자 겸 해삼위교회로 임명된 그는 만주·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독립군과 한인촌 동포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3년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연해주지역 기독교 탄압과 관련하여 많은 고난을 겪었다. 김영학은 이러한 사정을 1924년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시험과 핍박이 떠나지 않는 중 특별이 해삼지방은 니콜스크지방이나 연추지방보다 우심하였사오며 겸하여 도적과 흉년이 교회를 가해하는 가운데 주를 자세히 알지 못한 자와 믿음의 정신이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써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의심케 하여 배교한 자를 다 출케 하였으니 어찌 그들을 대하여 신음한 눈물이 없으리오마는 이것이 주의 뜻인줄로 인식하옵고 주께 기도하는 가운데 있사오며…….”

1930년 공산당에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이듬해 3월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1932년 음력 12월 신한촌 인근 노역장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면서 수십 명이 빠져 죽었는데 김 목사도 이때 순교했고 시베리아 선교도 막을 내렸다. 1933년 12월 7일 간도 용정에서 개회된 제3회 만주선교연회를 시작하면서 배형식 감리사 사회로 추도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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