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병서(金秉瑞, 1893. 1. 15∼1976. 6. 25)
평북 영변군 독산면 화죽동 금촌에서 부친 김정학과 모친 김성덕 사이에 태어났다. 부친은 심약(궁중에 바치는 약재조사를 맡는 벼슬)을 역임한 인물로 평북 박천읍에 한의원을 개원하였고 1887년 흑사병이 만연하였을 때 이를 퇴치하는 데 힘썼다. 그는 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자 영변에 유학시켜 유신학교를 졸업하도록 했으며, 의료선교사 노튼(A.H. Norton) 박사의 조수가 되어 예수를 믿고 의학과 영어, 독일어를 배우게 하였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선각자였다.
1913년 해주에 노튼기념병원과 남본정감리교회를 세운 노튼은 김병서를 불러 약국 일을 맡기는 한편 의학을 가르쳤고 1917년에는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하도록 하였으며, 김병서는 재학중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여 세브란스의전을 채 마치지도 않고 수료하였다.
한편 3·1운동을 앞두고 남본정감리교회에서 열린 모임에서 박희도·오세창·김병서·정재용이 황해도 대표로 선임되어 상경하게 되었는데, 마침 이날 사정이 있어 함께 가지 못한 그는 구세병원(노튼기념병원을 개칭) 직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그때 일경이 돌에 걸려 넘어지며 자기 칼에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일제는 이를 김병서가 죽였다고 체포하여 1년간의 옥고를 치렀고 의사면허까지 취소되었다. 1920년 말 출감한 그는 조선약학교를 졸업(1921∼1923)하고 약제사가 되어 구세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이 무렵 그는 남본정감리교회의 장로가 되어 황해도 평신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2년 노튼 박사가 세브란스병원 안과 교수로 부임하자, 하이디 부부가 내한하여 구세병원 원장으로 취임하나, 건강이 악화되어 1924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2년 동안 구세병원 원장이 공석이었다가, 1926년 김병서의 부탁으로 로제타 홀이 아들인 셔우드 홀을 원장으로 보냈다.
오후 산책을 즐기던 그와 홀은 어느 날, “동갑내기끼리 어떤 사업을 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홀은 정신병원 설립을 제안했고 김병서는 폐병요양소를 하자고 하니, 홀도 그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리하여 1928년 구세요양원과 결핵위생학교를 설립하고 결핵퇴치를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해주도립병원 의료외과장 김형익의 권유로 한지의사시험에 응하여 합격, 면허를 취득하였다(1930). 또한 그는 더 좋은 결핵요양소를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일본요양소를 시찰하고 돌아오면서 ‘인공기흉법’과 ‘자외선치료법’을 배워와 한국에 최초로 도입하였으며, 또한 크리스마스 실을 가져와 홀에게 “일본 사람들이 이것을 하니 우리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1932년 12월 3일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였는데, 그 도안으로 처음에는 거북선을 했다가 일제의 거부를 우려해 남대문으로 바꾸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실을 발행한 지 얼마 안 되어 주재소에 출두지시를 받고 갔다. 주임이 마치 큰 죄인을 대하듯, “이게 뭐요, 우표요?” 하였다. “그건 크리스마스 실 아닙니까?” “문제는 우매한 민중에게 우표 대신 이걸 붙이게 한 거요. 이건 순전히 고의적인 일이오. 우체국에서 물심 양면으로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겠소? 독립이니 뭐니 날뛰는 자보다 당신이 더 악질이오.” “그래, 어쩌자는 거요?” “당장 집어치우시오. 말 안 들으면 집어넣겠소.” 당시 우편국에서 김병서를 걸어 고소를 한 것이다. 그는 실의 연혁과 폐병퇴치 자금에 긴요하다는 긴 설명을 한 끝에야 풀려났고, 이후에도 몇 번 불려갔다 한다.
한편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상해에서 체포된 안창호가 한국으로 압송돼 2년 6개월의 징역을 살고 나와 폐결핵에 걸렸을 때, 그를 치료하여 준 것을 빌미로 황해도 흥사단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체포, 고통을 당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고 요양원에서도 추방되었다. 이후 황해도 연백군 용도면 천태리에 가서 황해의원을 개업하는 한편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농촌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성경을 가르치고자 백천복음농민학교를 설립하였다.
일제 말기 강제징용과 징병이 실시되면서 조만식 선생이 지원병 격려 연설을 강요받아 난처해졌을 때, 김병서가 폐결핵 진단서를 첨부하여 연설에 나가지 않도록 조치, 어려운 고비를 넘긴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배려로 해방 후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김병서가 15인 위원회 무임소위원으로 피택, 의료계 대표로 선임되었다.
그 후 어느 날, 옛날 그에게 신세를 진 공산당원 임홍수가 밤중에 찾아와 17번째 숙청대상이니 이 밤중으로 피신하라고 일러주어 38선을 넘게 되었고,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대구로 피난 간 그는 황해의원을 개업하고 주로 피난민을 치료하는 한편, 대구피난민회장으로 일하면서 삼덕동(동인동) 동인교회와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59년 66세의 김병서는 여생을 평안히 쉬시라는 자녀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경기도 양평 서종면 문호리에 월급 5천 원의 공의로 떠났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좀 형편이 나은 사람에게는 수가의 절반 정도를 받아, 1달에 수만 원씩 수입을 올리는 다른 의사들의 말도 많았지만, 자신은 5천 원 수입이 있으니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고 그것으로 자선사업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면 족하다고 했다. 그의 활동은 인술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숯을 구워 파는 벽지마을로 겨울에는 노름과 술,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산을 사서 주민들에게 품삯을 주고 개간토록 하였으며, 그 땅에 딸기를 심어 수익금을 나누어주었다. 또한 문을 닫고 있던 장로교회(문호교회)를 다시 열고 예배를 드렸다. 인술과 농촌운동, 교회재건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서종면 우체국장 계태수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일에는 교회를 맡아서 영적으로 계몽을 하고 평일에는 20리, 30리를 멀다 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니는데 밤이나 새벽이나 고단하다는 핑계 없이 돈이 있고 없는 것은 가리지 않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치료를 하셨다. 항상 칭찬해 마지않는 어른으로 뫼시고 있다.”
해주결핵요양원과 크리스마스 실 창안, 항일투쟁과 농촌운동, 전도에 힘쓰던 그는 1976년 6월 25일(83세)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흔히 결핵요양원과 크리스마스 실 모두 셔우드 홀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김병서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합동작업이라 해야 마땅하다. 3남 2녀를 두었고, 이 중 셋이 의사고 교회에서도 직분을 맡아 열심히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