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노득(金路得, 1903. 2. 16∼1968. 12. 30)
서울 종로 중학동에서 김익재와 변진성 사이에 5남매 중 막내로 출생. 당시 종교교회의 유사부장직을 맡고 있던 조부(祖父) 김상연의 권고로 일찍부터 예수를 믿는 기독교 가정이었으며, 이로 인해 김노득은 어릴 때부터 신앙을 지니고 자랐다. 7세 때에 당시 종교교회의 목사였던 홍종숙에게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유년기에 이미 남감리교회의 대표적인 여학교인 배화학당에서 3년간 초등교육을 받았다. 배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캠벨(J. Campbell)은 그의 재능에 놀라 처음 1학년에 입학한 것을 3학년으로 월반(越班)시켰다고 한다.
그는 1928년 배화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에는 1925년 미국에 건너가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황애덕(黃愛德) 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1928년 10월 부임하자마자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하고 농촌사업 지도자를 육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김노득은 황애덕이 최용신(崔容信)과 함께 농촌운동을 위해 ‘장래 일꾼으로 점찍어 놓고 정성 들여 양성한’ 제자 중 하나였다. 김노득은 실제적인 농촌운동 경험을 쌓게 하려는 황애덕의 배려로 1929년 여름방학 때 최용신과 함께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 두메산골로 갔다. 교회도 학교도 없는 외딴 곳이었는데, 김노득은 그곳에서 3개월을 지내면서 부녀자와 아동들을 대상으로 서당식 학교를 운영하고 야학도 열었다. 처음엔 오해하고 반대하던 주민들도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격해서 적극적인 자세로 돕게 되었다. 수안에서 3개월을 보낸 김노득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다시 수안으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그의 끈질긴 요청에 스승이었던 황애덕도 설득을 포기하고 그를 다시 수안으로 파송했다.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농촌의 현실을 파악했던 김노득은 졸업을 1년 앞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수안으로 내려가 해방되기까지 16년을 수안지방에 머물면서 농촌운동에 헌신하였다. 1935년 〈감리회보〉에 실린 기사는 김노득의 활동을 잘 증언하고 있다.
“경성 기독교조선감리회 신학교에 학적을 둔 김노득 양은 사리원지방 수안구역 내 용현(龍峴)교회에서 낮에는 80명의 무산아동을 모아서 문맹퇴치에 열중하고 밤에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야 2, 30리를 도보로 다니면서 전도하는바 캄캄한 밤에 등도 없이 다니다가 광야와 산간에서 실로(失路)를 하고 방황하기를 한두번이 아니며 그는 매일 밤 새로 2시경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는고로 평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으며 그리하야 이곳에는 주의 복음의 빛과 교육이 날로 보급되야 관민간(官民間)에 찬송하기를 마지아니 한다더라.”
김노득은 용현교회(1933)와 이목동교회(1934)를 설립하였으며 여성교육과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던 관계로 1938년에야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동시에 일본 고베신학교로 유학하여 사회사업학을 전공하고 3년 만에 귀국하여 황해도 수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해방이 되면서 집안에서 결혼문제가 대두되어 결혼을 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 남편이 북으로 납치되었다. 1945년에는 서울시 전재사회국(戰災社會局)에서 촉탁으로 시무하면서 피난민과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의 생계를 보살펴주었다. 그 후 시청 학무국 학무과 장학사로 시무하였으며, 1947년에는 배화여중 사감 및 교사로 초빙되어 들어갔다. 이듬해 총리원 부녀국 협동총무로 피선되어 전도사업에 종사하였으며,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여선교회 농촌부(생활지도부)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는 전재미망인(戰災未亡人)을 위한 성광모자원장으로 일했다. 이 모자원은 쇼(W.E. Shaw) 부인이 전재미망인을 돕고 싶어 그 협력자를 구하던 중 김노득을 만나 같이 출발한 것으로 주로 전재미망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보도기관이다. 그는 이 일에 정성을 바쳤고, 1968년 66세로 별세하였다.